주 양육자가 말이 없기 때문인가
많은 양육자들이 자신의 아이가 말이 느리면 아래와 같은 고민을 하곤 한다.
'내가 말을 많이 안 했나?'
'내가 사람들하고 만나지 않고 너무 집에만 처박혀 있었나?'
수다스러운 양육자와 과묵한 양육자는 아이의 언어발달에 큰 차이를 불러일으킬까?
대부분의 언어학자와 심리학자들은 비디오나 TV를 시청만을 통해서는 아이들이 제대로 제2외국어나 모국어를 습득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부모와의 상호작용이 아이의 언어 발달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전에 살펴봤듯이, 양육자와의 '상호작용'만이 '언어발달'에 절대적이고 핵심적인 요소라고 주장하긴 힘들다.
상호작용이 제일 중요하다는 논리가 맞다면, 말을 많이 하는 부모와 말수가 적은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의 언어발달은 큰 차이가 나야 정상일 것이다. 하지만 이와 관련된 연구결과에 따르면, 양육자가 아이에게 얼마나 '많이' 말하느냐는 아이의 언어발달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고 보기 어렵다. 즉, 내가 말을 많이 한다고 해서 아이의 언어발달이 빨라지지 않으며 내가 말수가 적다고 해서 아이의 언어발달이 느려지지 않는다.
양육자가 말이 많은 것이 아이 언어발달에 유리한 측면이 있다면 '같은 문장 구조를 반복'해서 아이가 모국어의 핵심 언어 구조를 익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정도일 것이다.
그래도 양육자는 조바심이 난다. 우리 아이가 말이 느린 게 큰 문제인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문제가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게는 그렇지 않다. 아이의 언어 발달은 느릴 수도 있고 빠를 수도 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언어를 배우는 모든 아이들은 특정 단계를 거쳐 모국어를 배워 나간다는 점이다.
먼저 상대방의 말을 알아듣고, 이해를 한다. 그다음에 한 음절이나 단어를 말하는 과정이 이어지고. 드디어 문법이 등장하면서 단어를 연결하고, 구나 문장을 완성해 가는 과정이 이어진다. 문법을 배울 때도 마찬가지다.
영어 문법으로 예를 들어보자.
1. 아이들은 먼저 "Go (현재형) - Went (Go의 과거형)"라는 동사의 현재-과거형 조합을 배운다.
2. 그다음, "Go-Goed"라고 틀리게 말하는 시기를 거친다. 이는 영어의 많은 동사들이 "-ed" 접미사를 붙여서 동사의 과거형을 만든다는 법칙을 배운 아이들이 하는 실수이기도 하고 언어를 배우는 과정 중 하나이다.
3. 이 시기가 지나고 다시 아이들은 "Go-Went"를 다시 제대로 배우게 된다.
이번에는 언어의 소리에 대해 알아보자. 아기들은 태어나서 돌이 될 때까지 모국어 소리를 집중적으로 배운다. 거꾸로 말하면 12개월 미만의 아기들은 모국어 외에 다른 언어의 소리에도 민감하고, 두 소리를 쉽게 구분한다. 별것 아니처럼 느껴지는가? 사실 엄청난 일이다. 왜 엄청난 일인지 이제 알아보도록 하겠다.
한국의 쇼 프로그램에 한 외국인이 나와 이런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다.
"난 '스포'하고 '스뽀'하고 똑같이 들려요"
'그게 말이 되나? ㅍ하고 ㅃ이 어떻게 똑같다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사실 영어권 화자라면 헷갈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영어에서는 ㅍ과 ㅃ의 소리 차이가 단어의 의미를 변하게 만드는 소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스포[pʰ]츠"라고 발음해도, "스뽀 [p']츠"라고 발음해도, 둘 다 스포츠 (sports)라고 알아듣는다. 즉, ㅍ와 ㅃ의 발음 차이가 무의미하다는 뜻이다. 그에 반해 한국어에서는 "포개다"와 "뽀개다"는 의미적으로 전혀 다른 말이다. 한국어에서 이 두 단어의 의미 차이는 ㅍ과 ㅃ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된 놀라운 사실이 있다. 아기들은 모국어가 한국어여도 영어여도 "ㅍ", "ㅃ", "ㅂ" 같은 발음을 처음엔 쉽게 구분한다. 그런데 이런 능력은 약 12개월이 되면 사라진다. 아기들이 모국어의 소리에 완전히 동화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 커서 영어를 배우면 한국어에 없는 '발음', '강세', '억양' 등과 같은 소리 성질을 배우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 당신은 한 살 때 이미 모국어에 인생을 바쳤다!
이와 같은 과정을 언어 습득의 마일스톤 (milestone)이라고 부른다. 모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여러 마일스톤을 잘 달성해 나간다는 의미이다. 쉽게 말하면 모국어 습득에서는 '속도'가 아니라 '무엇을' 습득하는지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아이의 말이 느리더라도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며, 아이의 말이 느린 이유가 내가 말수가 적어서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하루 종일 TV만 보는 게 아니라면, 아이가 말이 조금 느리다고 해서 양육자 자신을 탓할 필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