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rtngineer Aug 23. 2021

셧다운제 폐지에 대한 삐딱한 무논리 단상(斷想)

의원님들 그렇게 젊은이 인기가 고프셨습니까?

언제였는지 찾아보기도 귀찮은 2000년대 어느 날, 어떤 입법자들과 행정가들은 게임은 유해한 매체라 성장기 청소년에게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도 강력 범죄를 저지른 미성년자가 평소 폭력적인 게임을 즐겨했다는 뉴스를 접하고 게임의 유해성을 잠깐 고민해 만든 정책인 듯합니다. 오래 고민했다면 정책이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을 리가 없을 테니까요.

과정과 배경이야 어쨌든 셧다운제는 세상에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그 무쓸모를 오랜 시간 알렸습니다. 셧다운제가 게이머와 게임 개발자를 열 받게 하는 동안 웃지 못할 에피소드만 적잖이 생겼습니다. 일일이 적자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스타 크래프트 세계 대회 시합 중이던 한국 게이머가 셧다운제로 게임이 차단되어 대회를 포기해야 했다는 기사가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말 그대로 웃지 못할 에피소드였습니다. 최근에는 아이들에게 유독 인기가 많은 마인크래프트도 셧다운제 적용 대상이란 말에 감명받은 마이크로소프트가 이용 등급을 19세로 올려버린 일도 있었지요. 네모난 박스 덩어리들은 이제 법적으로 아동과 청소년에게 유해한 매체가 되었습니다.


마지막 줄의 '만 19세 이상이어야 합니다'란 말이 요즘 말로 웃픕니다.


셧다운제 도입만큼 갑작스럽게 이제는 국회의원들이 셧다운제 폐지를 거론합니다. 물론 그중에는 게임 산업에 오랜 시간 관심을 갖던 분들도 있습니다. 진짜 게이머와 게임 개발자를 생각해서 그런 분도 있고, 게임 산업의 미래를 생각해서 그런 분도 있습니다. 저도 그 점은 명확하게 하고 싶습니다. 진심으로 고민해 주던 분들이 있었다는 점을요. 그분들께는 언제나 감사합니다.

2030이란 이름으로 청년 문제가 떠오르면서 의원님들도 트렌드에 편승하고 싶으셨나 봅니다. 아무래도 게임은 젊은 사람들이 많이 한다는 이미지가 있어서 일까요? 요즘은 약발이 다 했는지 뜸해졌지만 얼마 전만 해도 하루가 멀다 하고 '셧다운제는 폐지해야 합니다'를 주장하는 의원님들을 보며 적잖이 착잡했습니다. 셧다운제는 사실 상 죽은 제도입니다. 있으면 살짝 귀찮은 일이 생기지만 없다고 게임 산업이 갑자기 융성하지도 않고 게이머들도 특별히 더 좋을 일은 없습니다. 심야까지 게임을 즐기고 싶어 하는 청소년들은 생각이 다를지도 모르겠지만요. 누군가는 셧다운제 폐지는 게임 탄압을 막는 첫 번째 상징이 될 거라고 거창하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저 역시 부디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셧다운제 폐지로 게임물 등급 분류처럼 비합리적인 규제가 철폐되고 게임이 사람들에게 건전한 취미이자 엔터테인먼트로 거듭날 수 있길 바랍니다. 하지만 그런 판단은 셧다운제 폐지 이후 몇 년에 걸쳐 지켜봐야 할 문제입니다.

가끔씩 게임 관련 토론회와 공청회 기사를 보고 있자면 여러 번 놀랍니다. 게임과 게임이 미치는 영향을 고민하는 시민 단체가 많았다는 점에서 놀라고, 저 마다 그럴싸한 이름이 붙어있다는 점에서 놀라고, 대체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 알 수 없어서 놀라고, 난데없이 종교 단체가 청소년 게임 문제에 고민하고 있다는 점에서 놀라고, 마지막에는 모두가 비슷한 결론을 낸다는 점에서 놀랍니다. 그 비슷한 결론은 뭘까요? 돈 내놓으라는 겁니다. 게임 중독 치료 기금 마련해야 하니 매출의 몇 퍼센트 내놓으라고 합니다. 게임이 사회에 미치는 유해성이 있으니 보상 차원에서 몇 퍼센트 내놓으라고 합니다. 어쨌든 게임은 안 좋으니 매출이든 수익이든 내놓으라고 합니다. 토론회와 공청회의 끝은 그런 식입니다.


게임 질병코드 분류 토론회에서 모 단체와 설전을 벌인 인기 유튜버(전 게임 기획자) 김성회 님. 저도 같이 분노했습니다.


셧다운제 폐지를 주장하시는 국회의원님들께서 진심으로 게이머를 생각하고 게임 산업의 미래를 고민하신다면 셧다운제처럼 걸고넘어지기 쉽고 있으나 마나 한 제도 폐지하라고 기자 회견까지 하시는 수고는 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바쁘신 의원님들께 많이 바라지 않습니다. 게임은 부정적인 영향도 끼치지만 긍정적인 효과가 더 크고 앞으로 더 크게 발전할 수 있는 고부가가치 산업이라는 흔하고 상투적인 표현이라도 가끔씩 공개적으로 한 마디 해주시면 바랄 게 없을 듯합니다. 그 이상에 신경 쓸 생각도 시간도 별로 없으시잖아요? 설마 그냥 손쉽고 만만하니까 한 마디 하신 건 아니시죠?


의원님들 선거 때 표 많이 받을 수 있다면 오늘 셧다운제 폐지 주장하다가도 내일 게임은 마약이라고 하실 분들이잖습니까? 정치 자금 더 모을 수 있다면 시민 단체든 이익 단체든 나서서 대변하고 게임 산업 매출 징수 법안 마련하실 분들이잖습니까?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셧다운제 폐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셧다운제는 끽해야 비 오는 날 살짝 젖는 양말 같은 겁니다. 살짝 찝찝하고 불편할 수 있지만 돌아다니는데 아무 문제없고 걷다 보면 금방 말라 불편하지도 않을 문제입니다. 저는 지켜보겠습니다. 셧다운제 폐지를 주장하셨던 의원님들 앞으로 몇 년 후에도 게임 산업과 게이머들 옹호하실지 지켜보겠습니다(물론 그분들이 몇 년 후에도 의원직 유지하고 계실지도 의문입니다. 가짜는 일찍 사라지는 법입니다). 표 더 받을 수 있을 것 같으니 종교 단체와 손 잡고 게임 탄압하는 법안 발의하실지 아닐지 지켜보겠습니다. 의원님들, 젊은이들 인기 좀 끌고 싶으셔서 셧다운제 폐지를 주장하시지는 않으셨겠지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