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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국이동통신서비스, 초라한 출발

1부. 통신사업 구조 개편

by 김문기

1984년 4월 30일, 한국이동통신서비스가 설립됐다. 이는 한국 이동통신 산업의 본격적인 출발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출발은 결코 화려하지 않았다. 당시 한국이동통신서비스는 수권자본금 5억원, 납입자본금 2억5천만원이라는 작은 규모로 시작했고, 별도의 청사조차 없어 서울 성동구 구의동에 위치한 광장전신전화국 청사 일부를 빌려 32명의 직원과 함께 업무를 개시했다. 작은 스타트업과도 같았던 이 회사는 이름만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겸손한 출발을 했다.

다운로드 (6).jpeg 한국이동통신서비스 주식회사(현 SKT) 현판식 [사진=SKT]

체신부와 한국전기통신공사는 무선호출기와 차량전화를 전문으로 담당할 별도 조직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984년 2월 10일 ‘차량전화 및 무선호출 전담회사 설립계획안’을 수립했다. 이에 따라 이우재 한국전기통신공사 사장을 발기인으로 하는 8인의 공사 관계자들이 설립을 주도했으며, 초대 사장으로는 유영린 전 한국전기통신공사 원주지사장이 선임됐다.


설립 당시 이동통신 시장의 환경은 극히 열악했다. 무선호출기(삐삐)나 차량전화(카폰) 서비스는 이미 해외 선진국에서는 널리 쓰이던 기술이었지만, 국내에서는 여전히 생소했고 상류층의 과시용 아이템처럼 여겨졌다. 이동통신 자체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취급을 받던 시절이었다.


현장도 마찬가지였다. 카폰 설치를 위한 서울 광장전화국 인근 중앙무선전신국 마당 한켠에는 천막으로 만든 임시 현장사무소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여름의 더위와 겨울의 한기를 그대로 견뎌야 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하루 평균 40~70대의 고객이 몰리며 직원들은 연일 야근에 시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은 활기찼고, 통신 기술이 일상으로 파고드는 시대의 서막이 조용히 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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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한국이동통신서비스는 1988년 4월 사명을 ‘한국이동통신’으로 변경하며 본격적인 독립 이동통신사업자로 탈바꿈했다. 1991년 12월에는 이동통신 가입자 수 100만명을 돌파했고, 1994년 선경그룹(현 SK그룹)이 지분을 인수하면서 민영화에 돌입, 1997년 ‘SK텔레콤’으로 사명을 변경해 국내 1위 이동통신사업자로 자리잡았다.


반면, 당시 역대 최대 규모로 출범한 한국전기통신공사는 이후 관료주의적 조직 한계를 드러내며 변화의 속도에 뒤처지는 위기를 맞았고, 독립 경영권을 확보하고 야심차게 출범했던 한국데이터통신 역시 IMF 이후 구조조정과 생존을 위한 자구책 마련에 고군분투해야 했다. 이처럼 가장 작게 시작한 기업이 가장 크게 성장하는 역설은, 한국 정보통신 산업의 역동성과 예측 불가능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한국이동통신서비스의 설립은 단순히 하나의 회사 출범을 넘어, 대한민국이 음성 중심 통신에서 이동 중심 통신으로 전환하는 결정적 분기점이었다. 이후 등장하는 1세대 아날로그 셀룰러 서비스와 더불어, 한국 사회는 급격한 커뮤니케이션 패러다임의 전환을 경험하게 된다.


부록: 주요 사건 정리

1984.02.10 체신부와 한국전기통신공사가 ‘차량전화 및 무선호출 전담회사 설립계획안’을 수립하며 이동통신 전문 법인 설립을 추진했다.

1984.04.30 한국이동통신서비스가 자본금 5억 원 규모로 설립돼 서울 성동구 광장전화국 일부를 임시 청사로 사용하며 32명의 직원으로 출발했다.

1980년대 중반 차량전화와 무선호출 서비스가 제한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으나, 여전히 상류층 중심의 호사품으로 인식됐다.

1988.04 한국이동통신서비스가 사명을 ‘한국이동통신’으로 변경해 독립 이동통신사업자로 전환했다.

1991.12 이동통신 가입자 수가 100만 명을 돌파하며 본격적인 대중화 국면에 진입했다.

1994년 선경그룹(현 SK그룹)이 한국이동통신 지분을 인수해 민영화를 추진했다.

1997년 한국이동통신이 ‘SK텔레콤’으로 사명을 변경하며 국내 최대 이동통신사업자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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