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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공중전기통신사업자 재편

2부. 韓 정보통신, 경쟁을 심다

by 김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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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전기통신사업자’ 지정은 한국이동통신서비스에게 있어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단순한 위탁 운영을 넘어,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이동통신 사업자로서의 지위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당시 국내 전기통신 관련 법령은 전기통신공사법, 전기통신기본법, 공중전기통신사업법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전기통신공사법은 한국전기통신공사의 설립과 운영의 근거가 되었고, 전기통신기본법은 통신정책의 기본 사항을 규정하는 역할을 맡았다. 공중전기통신사업법은 설비의 설치·운영, 이용자와의 사법적 관계, 정부의 경영 지도·감독 등 통신사업 전반에 대한 규범을 담고 있었다. 즉, 공중전기통신사업자로 지정된다는 것은 정보통신시장에서 자율적으로 사업을 영위할 수 있는 법적 지위를 획득하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까지 공중전기통신사업자로 지정된 기관은 한국전기통신공사, 한국데이터통신, 한국항만전화, 한국여행정보 등 네 곳뿐이었다. 한국항만전화는 1985년 한국전기통신공사가 50%를 출자하고 전국 6개 항구의 전화사업체가 참여해 설립됐으며, 항만 전화 사업을 전담했다. 한국여행정보는 1987년 한국데이터통신과 대한항공이 공동 출자하여 설립된 항공 예약 정보망 사업자로, 국내 최초의 민간 부가가치통신망(VAN) 사업자이기도 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한국이동통신서비스는 1988년 4월 30일 마침내 공중전기통신사업자로 지정되었다. 이는 단순히 차량전화와 무선호출기를 운영하는 위탁업체가 아니라, 자체 설비 구축과 기술 개발, 연구 사업에까지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본격적인 통신사업자로서의 독립 자격을 부여받은 것이었다.


공중전기통신사업자 지정 이후, 한국이동통신서비스는 변화를 빠르게 실행에 옮겼다. 1988년 5월 13일 사명을 ‘한국이동통신’으로 변경하며 독립성과 상징성을 강화했고, 임직원 수는 120명에서 199명으로 확대됐다. 자본금은 19억 원으로 증자됐으며, 한국전기통신공사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총 63억9,281만 원 상당의 현물 출자를 인수했다. 6월 1일에는 ‘한국전기통신공사와 한국이동통신 간 시설 이관과 설비 제공 및 이용에 관한 협정서’를 체결함으로써, 독자적인 사업 운영을 위한 실질적 기반도 마련했다.1)


이후 한국이동통신은 같은 해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국내 최초의 휴대형 이동전화 서비스를 선보이며 대중적인 관심을 끌었고, 1991년에는 가입자 100만 명을 돌파하며 명실상부한 이동통신 선도 사업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공중전기통신사업자 지정은 한국이동통신이 단순한 자회사에서 독립된 시장 주체로 도약할 수 있게 한 제도적 기반이었으며, 이는 한국 이동통신 산업이 독점 체제를 넘어 경쟁 체제로 전환되는 상징적 계기로도 작용했다. 이후의 민영화, 기술 상용화, 시장 경쟁 구도 형성은 이 시기의 제도적 결단 위에서 가능했던 일이다.


부록: 주요 사건 정리

1985년 한국전기통신공사와 항만 전화사업체들이 공동 출자해 ‘한국항만전화’를 설립하며 항만 전용 전화 서비스를 시작했다.

1987년 한국데이터통신과 대한항공이 공동 출자해 ‘한국여행정보’를 설립, 국내 최초의 민간 부가가치통신망(VAN) 사업을 개시했다.

1988.04.30 한국이동통신서비스가 공중전기통신사업자로 지정되어 독립 통신사업자로 승격했다.

1988.05.13 한국이동통신서비스가 사명을 ‘한국이동통신’으로 변경하고, 임직원 199명·자본금 19억 원 규모로 조직을 확충했다.

1988.06.01 한국전기통신공사와 한국이동통신이 ‘시설 이관 및 설비 이용 협정서’를 체결해 독자적 사업 운영의 기반을 마련했다.

1988년 하반기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한국이동통신이 국내 최초의 휴대형 이동전화 서비스를 선보이며 대중적 인지도를 확보했다.

1991년 한국이동통신의 이동전화 가입자 수가 100만 명을 돌파해 본격적인 대중화 시대로 진입했다.


1) <한국이동통신 경영자율화>, 한겨레, 1988. 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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