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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기 Jun 05. 2023

(41) ‘아이폰 쇼크'…다사다난 韓 상륙

11부. 아이폰 쇼크

  


2007년 1월 9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애플 맥월드 2007.


스티브 잡스가 연단에 오른다. 그가 손에 쥐고 있던 것은 그간 봐왔던 ‘아이팟’과는 모양새다 달랐다. 전 세계적으로 단말뿐만 아니라 이동통신의 생태계를 바꾼 게임체인저 ‘아이폰’의 첫 등장이다.


아이폰은 애플과 북미 2위 이동통신사 AT&T와의 비밀 회동을 통해 공개 6개월 만인 그 해 6월 29일 정식 출시됐다. 새로운 멀티터치 인터페이스, 모바일 운영체제 아이폰OS(iOS)와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마켓 ‘앱스토어’ 도입 등 소위 ‘아이폰 쇼크’라 불릴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첫 아이폰이 세상을 놀라게 했다면 2008년 7월 11일 출시된 2세대 아이폰3G는 대중화에 기여했다. 1세대는 2G 네트워크를 사용할 수 있었지만, 2세대부터 3G 네트워크 사용이 가능해졌다. 명칭부터 ‘3G’가 붙었다. 이후 속도를 더 높인 아이폰3GS가 2009년 6월 8일 공개됐다. 'S'는 '스피드(Speed)'에서 따왔다는 게 정설이다.


전 세계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한 아이폰은 우리나라에서 그림의 떡이었다. 정확하게는 얼리어답터 이외에 관심을 갖기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폰이 전 세계 출시된 후 2년간 국내 도입 자체가 요원했다. 왜 그토록 아이폰 국내 도입이 어려웠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제기됐다. 물론 아직까지 속 시원히 사실을 집기란 매우 어렵다. 다만,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여러 정황상 추측이 있긴 하다. 


우선, ‘위피(WIPI)’부터 말해야 한다. 지금은 잊힌 존재지만 당시에서는 무선 인터넷 플랫폼으로 국내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통합된 플랫폼을 사용하게 되면 그만큼 호환성과 효율성을 올릴 수 있다. 동일한 환경을 통해 디바이스와 콘텐츠의 끈끈한 연계를 도울 수 있다.


문제는 통합 플랫폼이 악용됐을 때다. 통합화됐다는 말은 타 플랫폼에 대해 배타적이라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갈라파고스에 빠질 수 있다. 고집이 심하면 아집이 되는 것이나 전통이 그 가치를 상실하면 인습이 되는 것과 상통한다.


'위피'도 마찬가지다. 초기 의도는 탁월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퇴색됐다. 스마트폰 도입 전 피처폰이 중심이던 시절, 휴대폰 생태계는 이통사 중심으로 형성됐다. 해외에서는 콘텐츠에 대한 전문 퍼블리셔가 있었지만 국내서는 이통사가 퍼블리셔 역할을 대신했다. 그러다 보니 진입장벽이 높았다. 콘텐츠 업체별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극대화됐다.


그 가운데 등장한 애플 앱스토어는 눈엣가시였다. 초기 앱스토어는 개발자들에게 수익을 배분하는 정책을 기본으로 했다. 위피를 가진 국내 기득권층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수익구조였다. 하지만 국내 개발자들 사이에서 위피의 폐해에 대해 지적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시대 흐름을 역행할 수는 없었다. 결국 방통위는 2009년 4월 1일 위피를 폐지했다.


또 다른 장애로 우리나라 군사적 상황과 지리적 위치가 영향을 미쳤다. 정확하게는 위치정보법 적용 문제가 거론됐다. 북한과 대치하고 있던 우리나라 군사적 특성상 위치정보는 민감했다. 


이 장애 제거는 이통사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용약관에 위치정보법 적용 여부를 포함시키기로 결정하면서 우회하는 방안이 마련됐다.


대체적으로 정책적 어려움이 사라지기는 했으나 산업적 측면에서의 걸림돌도 무시할 수 없다. 우리나라는 명실상부 단말 제조사들의 입김이 거셌다. 특히나 삼성전자와 이통사의 이해관계를 지나칠 수 없다. 업계에서는 국내 휴대폰 시장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삼성전자와 이통사 관계상 외산폰 도입, 더군다나 절대적인 대항마로 꼽히는 아이폰 도입을 섣불리 결정하기 어려웠다는 지적했다.  


기약 없는 지연…시작부터 '담달폰'


아이러니하게도 아이폰 도입에 적극 나선 곳은 한국통신의 명맥을 이은 KT였다. 이동통신 시장에서 만년 2위를 벗어나지 못한 KT, 한국통신이라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 그런데 이동통신 시장 역전을 위해서는 국내 제품이 아닌 외산폰 '아이폰'이 필요했다.


KT의 이 같은 절박함은 애플에게도 꽤나 매력적이었다. 그간 애플은 1위가 아닌 2위 이하 이통사를 아이폰 출시 사업자로 선택했다. 북미는 1위 버라이즌 대신 2위인 AT&T를, 일본은 1위 NTT도코모가 아닌 3위 소프트뱅크를 선택했다. 전세를 뒤집어야 하는 후발 격인 이동통신사와, 마찬가지로 휴대폰 시장의 후발주자인 애플의 시너지 효과는 절박함만큼 불탈 수 있었다. 


다만, 앞서 언급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위치정보법 등 여러 법적인 문제에 발목이 잡혔다. 아이폰 도입에 적극 나섰던 KT 역시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호언장담한 KT로서는 기약 없이 아이폰 출시를 뒤로 미뤄야 했다.


계속된 지연으로 인해 아이폰은 ‘담달폰’이라는 오명까지 쓰게 됐다. 결국 약속된 시간을 하릴없이 소모했다. 지지부진한 희망고문이 계속되기는 했으나, 마침내 2009년 11월 28일 마침내 KT가 ‘아이폰3GS’를 공개했다.1) KT는 잠실실내체육관을 대관해 대규모 행사를 진행할 만큼 마케팅에 총력을 기울였다. 아이폰을 사기 위해 인산인해를 이룬 잠실실내체육관, 이렇게나 줄을 설 수 있을까 놀라울 만큼 많은 인파가 몰렸다.


KT의 바람대로 아이폰3GS는 즉각적인 효과를 발휘했다. 아이폰3GS는 도입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판매량 100만 대는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 KT는 아이폰4도 단독 출시했다. 애플이 2010년 6월 8일 공개한 아이폰4는 국내서는 9월 10일 출시됐다. KT가 ‘아이폰 종주국’이라고 자평한 것도 이러한 과거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당시 SK텔레콤은 삼성전자와 손잡고 '옴니아'를 내놨지만 소위 ‘옴레기’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브랜드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이후 출시된 ‘갤럭시S’가 삼성전자를 대표하는 플래그십 모델로 부상했다. SK텔레콤도 KT보다는 늦었지만 2011년 3월 16일 아이폰4를 정식 도입했다. 사실 애플로서도 이례적인 상황이었다. 한 국가에서 복수 이통사가 아이폰을 출시한 사례가 없었기 때문. 그만큼 우리나라는 뭐든지 빨랐다. LG유플러스는 2014년 화면크기를 획기적으로 바꾼 아이폰6부터 경쟁에 참여했다.


1) 정주호 기자, <아이폰 공식 출시..밤부터 줄서기(종합)>, 연합뉴스, 2009.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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