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부. 아이폰 쇼크
2007년. 애플이 첫 아이폰을 내놓으면서 글로벌 휴대폰 지형도가 크게 변했다. 손 안의 PC라 불린 스마트폰이 전면에 등장하는 계기를 마련해 줬다.
기존 휴대폰 업체들은 아이폰의 성공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애플은 휴대폰 시장에서는 꽤 뒤떨어진 후발주자였다. 후발주자의 단 한 번의 맹공에 기존 강자들이 위기의식에 사로 잡힌 셈이다. 단번에 시장이 뒤집힐까 노심초사한 글로벌 제조사들은 아이폰의 기세를 꺾고, 자존감을 지킬 수 있는 전략폰 출시를 서둘렀다.
당시 이동통신 시장은 3세대 통신(3G)이 본격화됨에 따라 휴대폰이 시장의 주인공으로 격상된 상태였다. 국내 이통사의 경우 주된 경쟁력은 남보다 더 뛰어난 단말을 공급하는 능력일 정도였다. 가령, 갤럭시S** 등 최신 제품이 한 이통사에서만 출시되는 시대였다. 국내 제조업체뿐만 아니라 외산 제조업체들의 공세도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특히 3G에서 4G LTE로 이행되기 전까지 이통사와 제조사의 합종연횡은 지속됐다.
당시 휴대폰을 국내 공급한 제조사는 삼성전자와 LG전자, 팬택뿐만 아니라 SK텔레시스, KT테크, 아이리버, 애플, 소니, 레노버, HTC, 모토로라, 노키아, 리서치앤모션(현 블랙베리), 델, NEC카시오 등이다. 그 수만 헤아려도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했다.
누가 먼저 '스마트폰'이라고 불렀을까. 답은 딱 떨어지지 않는다. 누가 정확하게 언제부터 썼는지 뚜렷하지 않다. 정답이 없으니 속설이 꽤 많다.
물론 그 이전에 '스마트폰'이라는 단어를 아예 쓰지 않은 것은 아니다. 1992년 IBM은 퍼스널컴퓨터(PC)처럼 쓸 수 있는 전화기 '사이먼'을 발표하면서 이를 '스마트폰'이라 불렀다. '스마트폰'을 국어사전에도 '휴대전화에 여러 컴퓨터 지원 기능을 추가한 지능형 단말기'라고 정의 내린 것으로 보아 당시 IBM이 발표한 단말이 스마트폰이라 불릴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스마트폰'이라는 단어 자체가 대중적으로 쓰이지는 않았다. 고유 명사일뿐 보통 명사에 속하지 못했다. 스마트폰이라는 명칭은 자연스럽게 사라졌고, 휴대폰과 PDA라는 단어가 더 많이 활용됐다.
이같은 트렌드를 흔들 제품이 리서치인모션(RIM)의 '블랙베리'다. 마치 컴퓨터(PC)와 비슷한 물리식 쿼티 자판을 채택하면서, 임베디드 형태로 적용된 소프트웨어(SW)가 아닌 자체적인 운영체제(OS)까지 갖추고 있었다. 때문에 '블랙베리'는 휴대폰이면서 PDA 이기도 하면서, 그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이 때 역시도 '스마트폰'이라는 말이 크게 쓰인 것은 아니나 '메시징폰'이라는 신조어를 탄생시켰다.
'블랙베리'의 출현으로 인해 국내서도 블랙베리와 흡사한 제품들이 양산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삼성전자가 2006년 11월 14일 미국 이통사 싱귤러와이어리스(AT&T)를 통해 출시한 'HSDPA 스마트폰'을 꼽을 수 있다. 모델명 '블랙잭'으로 알려진 이 단말은 국내서 '울트라메시징'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블랙베리OS(BBOS) 대신 마이크로소프트(MS)의 윈도모바일 5.0 OS이 적용된 단말이다. 이 단말도 쿼티 자판과 자체 OS 등을 갖춰 어느 하나의 카테고리에 담기에는 그 의미가 컸다.
이렇게 기존 임베디드 형태의 칩과 OS가 아닌 마치 PC처럼 세분화된 생태계를 구성함에 따라 이를 모두 수렴할 수 있는 신규 명칭으로 '스마트폰'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정확한 해석은 아니지만, 제조사가 입력한 대로 사용자에게 일방향 UX를 전달해 주는 게 휴대폰이라면, 독립적으로 사용자와 양방향 소통이 가능해질 정도로 똑똑한 제품이라는 의미로 '스마트'하다는 인식이 생긴게 아닌가 추측한다.
점차 '스마트폰'이라는 새로운 명칭이 대중화될 즈음, 삼성전자는 앞서 보유한 노하우를 결집해 아이폰 대항마를 완성한다. 스마트폰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손 안의 PC라는 점에 착안해 '전지전능'을 슬로건으로 내건 윈도모바일 OS 신규 라인업 브랜드 '옴니아'를 내놨다. 세간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탄생한 '옴니아'를 통해 삼성전자는 더 큰 도약을 꿈꿨다.
LG전자의 스마트폰은 심비안 OS를 탑재한 3G 단말 '조이(LG-KS10)'를 꼽을 수 있다. 조이는 글로벌 시장을 겨냥해 출시된 단말로 구글과 제휴해 포털뿐만 아니라 구글맵과 G메일 등을 사용할 수 있었다. 국내 출시 제품을 기준으로는 2009년 2월 선보인 '인사이트'가 LG전자의 첫 스마트폰이라 할 수 있다. MS 윈도모바일 6.1 OS를 탑재하고 인터넷 풀브라우징이 가능했다.
팬택도 글로벌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2008년 10월 미국 이통사 AT&T를 통해 MS 윈도모바일 기반 듀얼 슬라이드폰 '팬택 듀오'를 공급했다.
외산 제조사의 경우 2008년 7월 2일 국내 출시된 HTC '터치 듀얼'이 첫 사례로 꼽힌다. 같은 해 12월 RIM 역시 블랙베리 볼드 9000을 출시했다. 애플 아이폰은 2009년 11월 28일 도입됐다.
애플 아이폰 대항마인 삼성전자 '옴니아'.
출시 전후로 옴니아의 위세는 대단했다. 삼성전자의 하드웨어 역량과 마이크로소프트(MS) 운영체제 소프트웨어 생태계, 각 분야에서 내노라하는 두 기업의 협력은 기대를 받기에 충분했다. 말 그대로 '전지전능'을 꿈꿨다.
첫 옴니아는 2008년 11월 27일 SK텔레콤을 통해 출시됐다. 4GB 모델은 96만 8천 원, 16GB 모델은 106만 8천100원이나 했다. 이후 옴니아 HD, 옴니아2가 연달아 출시됐다. KT를 통해서는 쇼옴니아를, LG유플러스에서는 오즈옴니아가 판매됐다. 영국과 미국 지역에서는 옴니아7이라는 명칭으로 론칭됐다.
기세등등했던 옴니아였지만 성적은 참혹했다. 미진한 생태계와 느린 속도, 각종 버그, 모바일에 익숙지 않은 PC UX 등에 소비자들의 표정이 구겨지기 시작했다. 심하게는 망치로 옴니아를 깨부수는 영상이 화제를 몰기도 했다. 한마디로 '모든 것이 가능하나, 모든 것이 잘 안된다'고 말할 수 있다.
2010년 당시 시장조사업체 마케팅인사이트 설문조사에 따르면 옴니아2는 소비자만족도에서 최하위를 기록했다. 특히 외관과 디자인, 키패드와 터치, OS, 인터넷, 앱 사용면에서 최저점을 받았다. 반대로 압도적인 1위는 역시나 아이폰이었다.
물론 삼성전자가 좌절만 했던 것은 아니다. 실패를 거울삼아 또다시 도전에 나섰다. 사실 이러한 도전정신은 예전부터 삼성전자를 일으켜 세운 근본 정신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1995년 3월 9일 삼성전자 구미사업장에서 진행된 '애니콜 화형식'은 지금도 회자되는 사건이다. 애니콜 불량률이 치솟던 시절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극단적으로 이야기해서, 농담이 아니라 마누라, 자식 빼놓고 다 바꿔라"라는 발언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그처럼 품질 혁신의 의지를 드러낸 일이 많지 않다. 결과적으로 이 화형식은 삼성전자를 국내 점유율 50% 이상 끌어올렸다.
삼성전자는 곧바로 '옴니아 단종'을 선언했다. 윈도모바일 대신 구글 안드로이드 운영체체(OS)로 전략을 수정했다. 절치부심한 삼성전자는 새로운 스마트폰을 고안했다. 소량다품종이 아닌 삼성전자를 대표할 수 있는 브랜드로 '갤럭시'를 구축하고 최상위 모델인 '갤럭시S'를 공개했다.
2010년 3월 23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ITA 2010에서 삼성전자는 현재까지도 회사를 대표하는 '갤럭시S'의 1세대 모델을 첫 공개했다. 옴니아와는 달리 갤럭시는 공개 직후 전 세계에서 진정한 아이폰 대항마가 탄생했다고 추켜 세웠다.
갤럭시S는 첫 공개 후 3개월 만인 6월 24일 SK텔레콤을 통해 출시됐다. 가격은 94만 9300원으로 책정됐다. 첫 출시를 기념하기 위해 각 협력사의 최고 경영진들이 참석했다. 신종균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사장과 SK텔레콤 하성민 대표, 구글의 앤디 루빈이 함께했다.
갤럭시S는 4인치 슈퍼 아몰레드 디스플레이와 9.9mm 얇은 두께, 1GHz 클럭속도의 삼성 모바일 AP, 16GB 저장공간, 500만 화소 오토포커스 후면 카메라 등 높은 하드웨어 성능을 갖췄다. 안드로이드 애플리케이션이 늘어남에 따라 활용폭이 더 넓어졌다.
삼성전자는 초도물량으로 5만 대를 생산해 전국에 공급했다. 첫날 5시간 만에 1만 대가 동났고, 5일 만에 10만 가입자를 돌파했다. 20만 가입자는 10일 만에, 50만 가입자는 1개월 만에 달성했다. 삼성전자의 호조로 SK텔레콤까지 덩달아 춤을 췄다.
국내서는 이통사의 입김이 강했던 시기로 제조업체의 요구보다는 이통사가 원하는 대로 스마트폰이 출시되는 시기였다. 갤럭시S는 SK텔레콤 전용폰으로 출시됐다. 타 이통사로는 스펙을 소폭 낮춘 변종 모델이 판매됐다. LG유플러스로는 같은 해 8월 19일 갤럭시U가, KT에서는 같은 해 10월 11일 갤럭시K로 모습을 달리했다.
옴니아를 통해 추락했던 이미지는 갤럭시S를 통해 다시 날아올랐다. 디자인부터 성능까지 많은 호평을 받았지만 무엇보다 마케팅 전략이 주효했다. 애플 아이폰에 대항할 수 있는 대표 제품이 부재한 상황에서 그 옆자리를 당당히 차지했다.
갤럭시S는 다음 해인 2011년 1월 1000만 대 돌파에 성공했다. 국내서는 200만 대, 유럽에서 250만 대, 북미에서 400만 대, 기타 150만 대를 팔아치웠다. 그로부터 1년 후인 2012년 1월 누적 판매량 2500만 대를 달성하기에 이르렀다.
2011년 출시된 갤럭시S2가 갤럭시의 대중화에 기여하면서 삼성전자는 휴대폰 강국인 노키아를 누르고 글로벌 휴대폰 시장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삼성전자는 옴니아 단종으로 아픔을 달랬으나, 윈도폰 역시 손을 놓지 않았다. 윈도폰 OS 라인업으로 신규 브랜드 '아티브'를 부활시켰다.
LG전자의 첫 스마트폰은 2009년 2월 이통 3사를 통해 출시한 LG-SU200, '인사이트'라 불린 제품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윈도모바일 6.1 운영체제(OS)를 적용했다. 다만 삼성전자가 윈도모바일 기반 '옴니아'로 참패를 겪으면서 LG전자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LG전자는 2010년 1월 다시 한번 윈도모바일 기반 스마트폰을 선보인다. 윈도CE5.2.2 OS 기반 LG-SU210, '레일라'폰이다. 꾹꾹 눌러 터치하는 감압식 패널을 갖춘 이 제품 역시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LG전자가 구글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를 도입한 때는 2010년 3월 10일로, KT를 통해 단독 출시된 '안드로원'이 꼽힌다. LG전자의 첫 안드로이드폰이다.
이후부터 LG전자는 대표 모델이라기보다는 시장 상황에 맞는 특화폰을 전략으로 내세웠다. 당시 이통사가 단말 유통권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여러 모델들을 이통 3사에 맞게 산발적으로 출시했다. 삼성전자가 플래그십 모델인 '갤럭시S'를 내놓을 때도, 팬택이 '베가'를 정식 브랜드로 론칭했을 때도 LG전자는 의연했다. LG전자는 '옵티머스'라는 스마트폰 브랜드가 있었으나 크게 이를 마케팅에 활용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LG전자는 2010년 6월 5일 슬라이드 물리식 쿼티 자판이 적용된 '옵티머스 Q'를 LG유플러스 단독으로 내놨다. 가격은 무려 89만 9천800원이었다. SK텔레콤과 KT에는 '옵티머스 Z'를 별도 공급했다. 가격은 옵티머스 Q와 동일했다.
물론 LG전자도 이통 3사 공용 모델을 내놓은 바 있다. 2010년 10월 4일 출시한 '옵티머스 원'이 그것. 국내에서는 출시 3주 만에 20만 대 판매를 돌파하며 LG의 새로운 희망으로 떠올랐다. 옵티머스 원은 2개월 만에 세계 판매량 100만 대 돌파, 3개월 만에 200만 대 판매량을 기록했다.
하지만 LG전자는 다시 과거로 회귀했다. LG유플러스를 통해 단독 모델인 '옵티머스 마하'를 출시하면서 특화폰 전략을 고수한 것. 2011년 1월 25일 SK텔레콤 단독 모델인 '옵티머스 2X'를, KT 단독모델로는 풍선보다 가볍다는 콘셉트의 '옵티머스 블랙'을, LG유플러스 단독 모델로는 밝기가 뛰어난 디스플레이를 탑재한 '옵티머스 빅'을 공급했다.
게다가 같은 해 무안경 3D 스마트폰인 '옵티머스 3D'를 SK텔레콤 단독으로, LG유플러스 단독으로 '옵티머스 Q2'를 내놨다. '옵티머스 EX'가 나온 때도 이때였다.
나름 성과는 있었다. 옵티머스 2X는 세계 최초 듀얼코어 스마트폰이라는 기록을 갖게 됐고, 물리식 자판이 전무후무했던 국내 시장에 옵티머스 Q 후속작까지 내놨다. 옵티머스 3D 역시 트라이 모드를 적용한 이색적인 모델로 꼽힌다.
문제는 판매량이었다. 당시 삼성전자는 갤럭시S에 이어 갤럭시S2로 휴대폰 강자인 노키아를 눌렀고, 팬택도 국내 시장 2위에 올라 '베가 레이서'로 입지를 단단히 했다. 그간 LG전자는 계속해서 헛바퀴만 돌뿐이었다.
팬택의 첫 스마트폰은 2010년 5월 SK텔레콤을 통해 출시한 '시리우스'다. 구글 안드로이드 기반의 3.7인치 OLED 디스플레이를 장착했다. 팬택 역시 이통사별로 다른 변종모델을 출시했는데, KT에서는 '이자르'를 LG유플러스에는 '미라크'를 내놨다.
2010년 7월 30일 팬택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베가'가 출시됐다. SK텔레콤을 통해 단독으로 출시됐다. KT와 LG유플러스에서는 '베가 Xpress'라는 이름으로 판매됐다.
이통사별로 다른 전략 모델을 선보인 팬택은 2011년 6월 10일 '베가 레이서'를 출시하면서 전략을 바꿨다. 삼성전자와 마찬가지로 이통사 동일 모델을 내놓은 것. 광고모델로 배우 이병헌을 내세우고 콘서트를 포함해 스포츠카인 페라리까지 경품으로 내세웠다. 베가 레이서는 누적 판매량 180만 대를 달성하면서 국내 스마트폰 2위 자리에 팬택을 올려놨다.
3G 시절 이통사는 자회사를 통해 자체적으로 단말을 공급하기도 했다. 다만 LTE 시대에 진입하면서 하나둘씩 사업 철수가 이뤄졌다.
SK텔레시스는 일명 '조인성폰'으로 불리는 '윈'을 내세웠다. 2011년 '윈2'까지 출시됐지만 이후 유명을 달리했다. KT는 '테이크' 브랜드로 국내 시장을 공략했다. 야누스, 타키, HD, 핏까지 KT를 통해 단독으로 여러 모델을 내놨지만 2012년 6월 17일 '테이크 LTE'를 끝으로 철수했다.
2010년 당시 무려 5인치 화면 크기의 스마트폰인 '스트릭'을 내놓은 델은 이후 소식이 묘연했다. 리서치인모션(RIM)은 2008년 12월 블랙베리 볼드 9000으로 국내시장 문을 두드린 이후 2011년 9월 19일 블랙베리 볼드 9900까지 공격적인 면모를 이어갔으나 끝내 좌절했다.
심비안 OS를 밀던 과거 휴대폰 왕국 노키아는 익스프레스 뮤직과 컴위드뮤직X6에 이어 마이크로소프트의 야심작 망고 등을 등에 업은 '루미아710'까지 내놨으나 무덤 속을 나오지는 못했다.
국내 첫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을 출시한 모토로라는 SK텔레콤을 통해 '모토로이'를 선보인 이후 2011년 11월 '레이저'까지 숨 가쁘게 달려왔으나 다음 모델부터는 이통사를 통해 찾을 수 없게 됐다.
국내 첫 LTE 스마트폰을 공개한 HTC는 그나마 외산업체들 중 눈에 띄는 행보를 이어갔으나 2011년 12월 15일 '센세이션 XL'를 끝으로 한국지사를 철수시켰다.
소니(당시 소니에릭슨)는 2009년 3월 25일 SK텔레콤을 통해 '엑스페리아X1'을 선보인 이후 2011년 10월 7일 '엑스페리아 레이'까지 국내 시장 문을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