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딸은 좋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이현 May 30. 2019

뚫어뻥 : 변기를 뚫고 갚은 빚


  '나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수많은 사람에게서 너무도 많은 도움을 받아왔어. 이제 내가 너에게 그 친절을 돌려주는 거야.'
  - '보답은 릴레이로', 김하나


  사뭇 아름다운 글귀로 시작하였으나, 사실 조금 더러운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그러니 비위가 약하신 분들은 부디 이 글을 읽지 않기를 미리 당부드린다.


  나는 유독 변기를 잘 막히게 한다. 양이 많은 건지 휴지를 많이 사용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렸을 때부터 변기가 참 자주 막혔다. 대학생 때는 자취방의 변기가 막혀 사람까지 불러 오만 원인가 십만 원인가 -아니면 십만 원인데 팔만 원에 해준다고 했던가, 아무튼 학생에게는 무척이나 큰돈- 를 쓰기도 했다. 그때 변기를 뚫어준 아저씨는 기관총 모양의 기다란 스프링 같은 걸 들고 와서는, 이게 독일에서 온 물건인데, 얼마짜리라나 뭐라나 하며 본인의 품삯을 정당화했다. 그 이후로도 내가 앉았던 변기들은 막히기를 계속하여 나는 점차 막힌 변기를 뚫는 일에 제법 익숙해졌고, 이제는 나름 일가견도 가지게 됐다. 요즘에는 피스톤이 달린 뚫어뻥도 많이 팔지만 내게는 그저 거추장스러운 기능일 뿐, 기다란 막대기에 반으로 자른 까만 고무공 같은 게 붙어있는 기본적인 형태의 뚫어뻥이면 충분하다. 뭐든지 베이식과 심플함을 중시하는 내 취향과도 일치하고.

이 정직한 형태를 보라


  지금이야 기본형 뚫어뻥 하나면 별 무리 없이 시원하게 변기를 뚫어내지만, 이 경지에 이르기까지는 물론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나 역시 철물점에 가서 피스톤이 달린 뚫어뻥을 사보기도 했고, 검색을 하면 많이 나오는 방법인 변기 위에 비닐봉지를 칭칭 감아 붙여서 물 내리기도 시도해 봤다. 효과는 썩 시원치 않았다. 이론과 실제는 다른 법이다.

  그렇게 변기를 뚫는 게 아직 익숙하지 않았을 때, 그러니까 내가 막히게 한 거지만 대체 더러워서 누가 대신 뚫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철없던 시절, 정말 철없는 짓을 한 적이 있다. 군대에서 휴가를 나온 어느 날이었다. 한 동기와 술을 마시기로 하고, 부대와 멀지 않던 그 녀석의 집에 잠깐 들렀다. 그러니까 그 동기 녀석 부모님의 집.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신축 아파트. 그 집에서 ‘꾸르륵’ 신호가 왔다. 어떤 이유였던지, 안방에 있는 화장실을 사용했다. 그리고 내가 앉은 그 변기는 역시나 막혀버렸다. 당황한 나는 한번 더 물을 내렸다.

   ...

  넘치고 말았다.

  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일단 화장실을 빠져나와 이 사실을 동기에게 ‘보고’했다. 직장인이든 군인이든 보고는 생명이니까.

  ‘...’

  동기는 잠시 아무 말이 없더니, 잔뜩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그냥 나가자!”

  화장실 문은 열어보지도 않았던 것 같다. 부모님은 집을 비운 상황이었는데, 우리는 넘친 변기 물 -그것도 안방 화장실 바닥에- 을 뒤로 하고 밖으로 나와 술을 마셨다. 장속이 편해진 나는 술을 참 맛있게도 마셨던 것 같다.



  며칠 전, 안방에서 약간 퀴퀴한 냄새가 났다. 냄새에 민감한 나는 집에 들어와 안방을 먼저 환기시켰다. 거실에 화장지가 떨어져 안방 화장실에 들어가니 - 안방 화장실은 잘 사용하지 않아 창고 겸용으로 쓴다 - 하수구 냄새가 많이 났다.

  ‘날씨가 더워져서 그런가’

  냄새를 차단하기 위해 세면대와 바닥 배수구에 물을 붓고, 임시방편으로 막아뒀다. 다음 날, 아내가 거실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는데 오줌이 마려워 안방 화장실로 갔다. 냄새는 여전했다. 아무튼 볼 일을 보려고 변기 뚜껑을 열었는데,

   …

  막혀 있었다. 자세한 광경은 묘사하지는 않으련다. 냄새의 원인은 그곳이었다. 누군가 변기가 막힌 것을 미처 모르고 그냥 화장실을 나온 것이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아내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그리고 심문했다.

  “(아내와 딸) 둘 중 누구야? 어서 고백해.”

  누가 범인인지는 밝히지 않으련다.


  서두에 인용한 ‘보답은 릴레이로’라는 글에서 김하나 작가는 또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나는 마음의 빚 따위는 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답은 그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하는 거니까.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가 도움이 필요한 다른 사람에게 보답하면 되니까.’


  아무튼 내 변기 뚫기 경력이 얼마인가. 똥물과의 사투 끝에 시원하게 변기를 뚫어내고 아내에게 말했다.

  “그때, 군대 동기의 부모님 -아마 어머니였을 것 같은데-은 내가 막히게 했던 변기를 뚫으셨을 거야. 이제 내가 이 변기를 뚫으니 그분에게 진 빚을 비로소 갚은 느낌이야.”



인용된 책

 - 김하나, '힘 빼기의 기술' (2017)

매거진의 이전글 이케아에서 생긴 일 : 실수는 때로 가족애를 키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