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삼십 대 후반의 남자다. 아내와 딸과 함께 살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직장도 다니고 있다. 대부분 직원이 남자고, 사무보조를 맡은 직원을 ‘여직원’이라고 부르는 회사. 남자 중학교, 남자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초등학교 1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을 제외하면 여자 선생님과도 만나본 적이 없다. 날로 커가는 딸을 보면서, 아내와 가끔 말다툼을 하면서 여자와 남자의 세계가 많이 다르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과거로 돌아가 다시 연애를 하라면 정말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이런 내가 우리 사회에서 여자가 처한 상황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조금 뻔뻔하게 들릴지 몰라도 내 잘못은 아닌 것 같다. 사실 여자들조차 자신이 받고 있는 차별이나 불합리를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테니까. ‘왜 그 시간까지 술을 마셨데, 걔도 좀 잘못했네.’ 회사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보다 더 어린 여자 직원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그만큼,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여성을 억압하는 일에 익숙하다.
나는 인간 사회가 문명화가 된 이후에 태어난 걸 퍽이나 다행으로 생각한다. 법이 없었다면, 도덕이 없었다면, 예절이 없었다면, 그러니까 그냥 육체적인 힘의 논리만 있는 세상이었다면 나는 이미 도태되었을 것이다. 힘이 센 남자들에게 매일 같이 이용당하거나 비굴하게 살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미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아 이 세상에 없었을지도 모르고. 우리가 ‘동물의 왕국’ 같은 다큐멘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세계라면 말이다.
역사에는 무지하지만, 다행히 인간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 같다. (물리적인) 약육강식만으로는 우리 사회가 지탱되기 힘들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도덕과 윤리, 그에 따른 예절, 그리고 사회가 복잡해지면서는 법이라는 것까지 만들어진 것일 테다.
그렇다 하더라도 왜소한 남자들은 여전히 키가 크고 덩치가 좋은 남자들에게 콤플렉스가 남아있지 않나 한다. 건강을 위해서라기보다 ‘가슴 근육’을 키우기 위해 운동을 하는 남자들이 여전히 많은 것을 보면.
힘센 남자는 죄가 없다. 그리고 그들은 아마 힘이 약한 남자의 은근한 콤플렉스를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키가 큰 친구가 하나 있다. 그 친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바지를 사면 밑단을 줄여서 입는지 몰랐다. 수선비까지 줘가면서.
키 큰 사람이 작은 사람의 고충을 헤아리기 어려운 것처럼, 남자가 여자의 고충을 알기란 여간해서는 쉽지 않다. 하물며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단지 키 차이에 머물지 않는다. 팀장님이 종종 하는 말이 있다. 이렇게 문명화된 사회에서, 모든 법이 만인에게 평등한데 (물론 부자와 정치인들 빼고) 남녀 차별이 말이 되느냐고. 게다가 집에 가면 부인에게 찍소리도 못하고, 출근길에는 음식물 쓰레기까지 들고 나오는데, 여성 차별이 웬 말이냐고. ‘이거 역차별 아니야?’
자신도 모르게 가해자가 되는 상황이 있다. 사실 맘먹고 범죄를 저지르거나 누가 봐도 명백한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니라면 대부분은 본인이 가해자자 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조차 어렵다. 피해를 당한 쪽만 답답하고 억울할 뿐이다.
회사에서 우리 부서의 입지는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팀장이 매번 더 높은 관리직으로 임명되어, 알게 모르게 불이익을 많이 받는다. 우리 팀장님은 매번 임원 발탁에서 제외돼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교육이나 세미나 참석의 기회에서 신입사원 채용까지 뭐 하나 공평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팀원들은 옆 팀을 퍽이나 못마땅해한다. 피해의식이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옆 팀원들은 우리의 사이가 다른 어떤 팀들보다 좋다고 생각한다. 차마 그들에게 우리의 피해의식을 직접 말할 수는 없다.
사실 말을 한다고 해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어머니는 내 결혼을 반대하셨다. 그 과정에서 내 아내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남았다. 결혼 후에도 차가운 태도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가끔 불만을 토로하면 ‘부모가 자식 결혼을 반대도 할 수 있는 거지’라고 하신다. 미안하다고 사과할 마음은 추호만큼도 없다. 오히려 건방진 자식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고통을 알지 못한다.
결혼 생활을 하면서 알게 된 게 있다. 나는 대화를 할 때 먼저 잘 듣고 공감해 주기보다는 솔루션을 제시하려고 한다. 흔한 이야기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이후로 지겹도록 반복되는 이야기. 글로는 알지만 현실에서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더구나 맨스 플레인의 유혹을 뿌리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나 역시 ‘집안일을 해도 내가 더 잘하겠다’나 ‘학부모가 되려 하지 말고 부모가 돼야지’ 같은 주제넘은 소리를 와이프에게 해댄다. 공감능력의 부족이다.
공감능력의 부족에 성별 차이 운운하는 건 사실 손쉬운 변명이다. 회사에서 친하게 지내는 Y과장은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 우리끼리는 ‘공감 요정’이라고 부른다. 많은 또래 직원들이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받거나 짜증 나는 일이 있으면 Y과장에게 커피를 사주며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는 아내와의 사이도 무척이나 좋다.
안타깝게도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Y과장 같지는 않다.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완벽히 상대에 빙의해서 맞장구친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몇 년 전 탄핵이 된 대통령은 공감능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분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물론 정신적 지주였던 한 사람의 말은 제외하고. 세월호 피해자 가족들의 이야기에 조금만 더 귀를 기울였더라면, 아마 탄핵까지 당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도 해본다. 물론 그분이 직접적인 가해자는 아닐 수 있다. 직접 배를 운항한 것도 아니고, 직접 배를 출항시킨 것도 아니니까. 그렇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 모두가 가해자라는 것을. 부조리한 것을 모르는 척 넘어가고,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청소년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따지지 말라고 가르쳤던 우리 모두가 가해자라는 것을.
오히려 그분은 감옥 안에서 본인을 정쟁의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분의 귀는 굳게 닫혀있다. 처음부터, 태어났을 때부터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변 환경이, 항상 마주치는 사람들이, 그러니까 그분의 인생사가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남자의 인생사가 꼭 그렇다. 세상은 남성을 중심으로 돈다. 이미 남성의 목소리로 이루어진 세상에 살던 남자들은 본인이 가해자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 당혹스럽고 불쾌하기까지 하다. 맞벌이를 하는 팀장님은 여전히 분리수거를 본인이 한다는 사실이 억울하고, 공감 요정 Y과장은 인터넷에서 우연히 본 '메갈'이니 '워마드'이야기를 떠든다.
그들에게 미처 전하지 못한 말이 있다. 일단 한번 들어보자는 말. 여자들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어떤 말이 하고 싶은 건지 먼저 들어보자는 말.
듣기도 전부터 남자의 고단한 삶에 대해 얘기하고, 역차별이라는 그럴 듯 한 단어로 말을 가로막지 말고. 역차별이 있다면 그 이전부터 있었던 차별은 과연 무엇인지 한번 들어보자고. 공감 요정님아, 여기서도 능력 발휘 한번 해보자고.
나도 남자라서 아는데 참, 어려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