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를 당분간 안 먹어 보려 한 적이 있다. 건강상의 이유였다. 우연히 들렀던 한의원에서 밀가루와 고기를 끊어보라 권해,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한 번 시작해 봤다. 국수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밀가루를 끊는 게 더 어려우리라 짐작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해보니 고기를 먹지 않는 게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어느 식당에 가더라도 고기를, 또는 고깃국물을 피하는 건 쉽지 않았다. 나 때문에 식구들에게도 고기를 못 먹게 할 수는 없었으므로 집에서도 반찬을 골라 먹어야 했다. 우선 세 달 정도 해보려고 했던 고기, 밀가루 안 먹기 작전은 2주도 채 못 채우고 포기했다. 이 땅에서는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라는 걸 깨달으면서.
원래 아는 사람도 별로 없지만, 주변에 채식주의자는 거의 없다. 보수적이고 남초인 직장에 다니다 보니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을 만날 기회는 거의 없다고 봐도 좋다. 딱 한 명 생각나는 사람은 와이프의 친구이다. 그 친구가 고기를 끊게 된 계기는 이렇다. ‘고기가 질려서.’ 독일인가 어디에서 잠시 머문 적이 있는데, 홈스테이를 했던 집에서 끊임없이 고기를 줬다는 것이다. 그 후로는 더 이상 고기는 ‘질려서’ 먹지 못하겠다는 것.
채식주의자라는 단어의 무게가 그렇게 무거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주의자’라고 이름 붙이기 민망할 정도다. 친구 중 하나는 오이 냄새를 못 맡아 김밥에 들어 있는 오이도 다 빼내야 하고, 회사의 누구는 그냥 고기는 좋아하지만 ‘물에 빠진 고기’ 즉 순댓국 같은 종류는 먹지 않는다. 단지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걸 그렇게 유별나게 바라볼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중 일부는, 아니 사실은 많은 채식주의자들이 ‘동물의 착취에 반대하는 삶의 방식과 철학’(https://brunch.co.kr/@understaim/12)을 실천하기 위해 채식을 한다. 다시 그들에게 ‘주의자’라 호칭해야 할 이유다. 건강상의 이유로 혹은 단순한 취향 때문에 채식을 한다면 사람들은 그나마 고개를 끄덕거리겠지만, (물론 ‘에이, 그래도 고기를 먹어야 기운이 나지!’라고 하는 게 대부분이기는 하겠지만) ‘착취’나 ‘철학’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2초 정도 어색한 정적이 흐를 것이다. 최악의 경우 ‘풉’이나 ‘피식’ 같은 소리가 새어 나올 수도 있다. ‘그냥, 고기가 잘 안 맞아서요.’ 정도로 얼버무리는 게 낫지 않을까. 아무튼 나라면, 우리 회사 사람들과 점심을 먹을 때 그런 단어는 입에 올리지 않겠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고기 없으면 못 사는 정도는 아니지만, 하루에 한 끼 정도는 고기를 먹어야 허전하지 않다. 스테이크는 미디엄 레어가 좋고, 돼지고기는 굽는 것보다 삶는 것을 선호한다. 아직은 내 삶의 패턴을 바꾸거나 먹고 싶은 걸 참아내야 하는 인내까지는 감수하고 싶지 않으니, 뻔뻔하지만 당분간은 고기를 계속 먹을 생각이다.
그렇더라도 나는 채식주의자들의 가치를 존중하고 배우고 싶다. 원래 나한테 불리한 이야기는 잘 듣지 않는 편이지만 동물권이나 비거니즘은 알고 싶다.
개를 무서워한다. 워낙 겁도 많은 데다, 개를 키워본 경험도 없고 초등학생 때 동네의 커다란 백구에게 쫓겨 도망치다 넘어진 기억도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작은 강아지도 귀엽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강아지뿐 아니라 내 입으로 ‘귀여워’라는 단어 자체를 말해본 적이 없다. 어느 날, 아기가 태어났다. 원래 아기도 많이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냥 좀 성가신 존재였을 수도 있겠다. 사실,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별 생각조차 없었을지도. 그런데, 참 귀여웠다. 아무것도 모르는 작고 조그만 생명체가 발을 꼼지락대고, 내 손가락도 잡아보고, 똥도 누고, 앙 울기도 하고, 방긋 웃기도 한다. ‘귀엽다’는 말이 더 이상 어색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강아지도 귀여워졌다. ‘귀엽다’라는 의미를 알게 되었던 것 같다. 강아지만 귀여운 것은 아닐 것이다. 모든 어린 생명체는 귀엽다. 그리고 모든 생명체는 소중하다.
물론 사람도 똑같이 소중하다. 그리고 개개인의 취향과 입맛도 존중받아야 한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보통 사람은 이유식을 할 때부터 고기를 접한다. 어느 작가의 말처럼 ‘하필 우리는 먹어야 하는 입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생계형 낚시꾼, 한창훈 작가의 말이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죽인 것은 전부 먹자.’ 이를테면 바늘을 삼킨 노래미는 어린놈이라도 가져와 먹는다는 것이다. 물에 다시 놔줘 봐야 죽으니까. 구석구석 살뜰히 먹는 게 죽인 생선에 대한 예의라고. 그렇게 하면 그만큼 다른 것을 덜 먹게 되기도 한다고.
소나 돼지, 닭도 비슷할 것이다. 죽였다면 살뜰히 먹는 게 우리를 위해 희생한 동물들에 대한 예의이다. 죽이는 걸 긍정하자는 것은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불필요하게 먹지 않는 것, 그러니까 불필요하게 죽이지 않는 것이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에 대한 예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덜 먹게 되면 단지 ‘많이, 싸게’ 먹기 위해 동물을 착취하는 일도 점차 줄어들지 않을까.
최근에 개고기를 먹는 사람은 눈에 띄게 줄어든 것 같다. 일부 어르신을 제외하면 일부러 찾아 먹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한참 개고기 논쟁을 할 때 자주 나오던 레퍼토리가 있다. 개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고도 어떻게 먹을 수 있느냐고. 그러면 옹호자들은 이렇게 답했다. 그럼 소의 눈은? 그 크고, 순하고, 순수한 눈망울은 어떻냐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똑 떨어질 것 같은 그 눈을 말이다. 그렇게 말하고 사람들은 개든 소든 더 열심히 먹었다.
개나 소나 (왠지 경망스럽게 들리는데) 똑같은 동물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저 대화에 이어질 다음 대답을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개뿐만 아니라 소도 먹으면 안 되는 것이라고.’
앗, 아니다. 내가 너무 성급했다. 그러니 소를 먹을 때도 ‘예의’란 게 있는 것이라고. 그들이 태어난 이유가 단지 미디엄 레어 스테이크가 되기 위함은 아니니까.
인용된 책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 한창훈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