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의 마지노선
‘딩동’ 벨이 울린다. 밖에서 놀던 딸이 돌아올 시간이다. 대개 스스로 번호키를 누르고 들어오는데, 초인종을 누르는 건 아빠와 장난을 치고 싶어서다. 누구세요, 하면 나름 목소리를 깔고서 ‘택배 왔습니다!’ 이런다. 문을 열고 몰랐던 척, 깜짝이야! 택배 온지 알았는데! 하면서 장단을 맞춰준다.
지금처럼 인터넷 쇼핑이 대중화되기 전에는 소포를 받는 게 흔한 일은 아니었다. 택배보다 소포라는 말이 더 익숙했던 시절이다. 워낙에 가끔 있는 일이라 소포를 전해주는 우체부 아저씨에게 델몬트, 무가당이라고 붙어있는 두꺼운 유리병의 오렌지 주스도 한잔씩 대접했던 것 같다.
요즘은 하루에도 몇 차례씩 택배를 받아보지만, 택배 상자나 비닐을 뜯는 순간은 여전히 설렌다. 딸애도 본인의 옷이나 학용품 같은 걸 주문해주면 목이 빠지게 기다린다. 그런 아이에게 택배 기사는 무척이나 친숙한 직업이다. 비단 우리 아이에게만 그런 것은 아닌가 보다. 친구 집에 놀러 갔다 온 아이가 그런다. ‘내 친구도 집에 들어갈 때 초인종을 누르더니, 택배 왔습니다, 그러더라고!’ 키자니아나 잡월드와 같은 어린이들이 각종 직업을 체험할 수 있는 시설에도 택배기사 체험관은 인기다. 택배회사의 조끼를 걸치고 작은 상자를 들고 배달을 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만화 속에서 나온 것처럼 귀엽다.
택배로 배송되는 인터넷 쇼핑은 이제 많은 사람에게 필수 불가결이다. 여전히 매장에 들러 직접 물건을 보고 점원과 말을 섞어가며 사는 게 좋을 때도 있다. 그렇더라도 어디서 사야 할지 막막했던 물건들도 어지간하면 다 찾을 수 있고, 대개는 가격도 더 저렴해서 결국은 온라인을 많이 이용하게 된다.
우리 집은 하루에 두세 번 꼴로 크고 작은 택배가 도착한다. 최근에는 신선한 야채나 과일을 포함한 식료품도 온라인 주문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 현관을 열면 커다란 상자가 선물같이 놓여있다. 테이프를 뜯어보면 신선한 식재료들이 은박지까지 붙어있는 상자 안에 말끔히 들어있다. 버려지는 포장재를 보면 너무 많은 쓰레기를 배출하는 것 같아 죄스러운 마음이 들지만, 최근에는 다음 배달 때 종이박스와 아이스팩을 다시 수거해가서 죄책감을 조금 덜어주기도 한다.
인터넷 쇼핑이 이렇게까지 보급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빠르고 저렴한 택배 서비스일 것이다. 특히 가격이 싼 물건일수록 배송비의 비중은 커진다. ‘한권만 사도 무료배송’이 없었다면 책을 아무리 할인해준다 한들 온라인 서점이 지금처럼 성장하지는 못했을지 모른다. 최근에는 당일배송, 총알배송이라는 서비스도 등장했다. 꼭 당일배송이 아니더라도 이제 인터넷 쇼핑을 하면 다음날에는 물건을 받아 드는 게 상식적인 속도가 됐다. 이처럼 빠르고 저렴한 배송은 택배기사의 저임금과 과잉 노동으로 가능하다.
내 딸이, 딸의 친구가, 밝은 목소리로 택배 아저씨를 흉내 낼 때, 아이들이 직업 체험장에서 아장아장 택배기사 놀이를 하는 걸 볼 때면, 왠지 택배 기사님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실제 택배 기사들은 ‘택배 왔습니다’하고 현관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여유조차 없다. 문을 열면 앞뒤 볼 것 없이 물건만 건네주고 다시 잰걸음을 한다. 문을 조금 늦게 열면 물건은 문 앞에 놓여있고 기사님은 온데간데 보이지 않는다. 아침에 현관을 열면 놓여있는 선물 같은 박스를 전해준 아저씨는 밤새 배달을 하고 낮에는 과연 쉬고 있을까. 더 이상 포장재는 쓰레기로 배출하지 않지만, 택배를 받아 들 때의 묘한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딸애는 고대하고 있는 자신의 택배는 오지 않고 계속 엄마 아빠 것만 배달되면, 내 것은 언제 오느냐고 뾰로통 해진다. 그럴 때면, 택배 아저씨도 밤에는 잠을 자야 하고 주말에는 우리처럼 가족이랑 쉬어야지 하며 달랜다.
거짓말이다. 택배 기사는 사실 주말에도 잘 쉬지 못하고 잠도 충분히 자지 못한다. 배송이 늦는 건 대부분 발송자 측에서 늦게 보내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딸에게는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사회의 모습을 말한다. ‘정상’적인 사회의 마지노선에 대한 감각을 길러준달까. 배송이 하루 이틀 늦어도 되니까, 새벽 배송 따위는 없어도 되니까, 택배 아저씨도 충분히 쉴 수 있는 사회.
딸애는 엄마나 내가 택배 아저씨에게 물건을 받고 마실 걸 건네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바쁜 택배 아저씨의 모습을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니까, 배송비가 좀 오르면 좋겠다. 배송 기간도 우체국의 빠른 등기, 일반 등기처럼 차등 적용하면 어떨까. 오른 요금으로 더 많은 택배 기사를 고용하고, 그들의 임금을 올려줄 수 있다면 기꺼이 치르겠다. 그러면 작거나 크거나, 싸거나 비싸거나 모조리 인터넷으로 주문해서 괜한 포장용 비닐과 상자를 낭비하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택배 아저씨들이 조금 더 여유 있게 다닐 수 있겠지. 수고하시네요, 하며 정수기에서 시원한 물도 따라드릴 수도 있겠지.
그러면 나도 택배 상자를 열면서 맘껏, 설렐 수도 있을 것 같다.
표지 이미지 : Cosmin Vulpe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