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이현 Jul 05. 2019

직장 생활의 만족도와 옷 입기의 상관관계

  패션은 애티튜드다.


언제인가 에스콰이어 잡지에서 배우 주성치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그는 달리는 걸 좋아한다고 한다. 그래서 언제든 뛸 수 있도록 항상 스니커즈를 신는다고. (패션지는 운동화나 조깅화라는 말보다는 스니커즈라는 단어를 선호한다.) 지금처럼 정장 아래 운동화를 신는 게 유행하기 한참 전부터 그는 공식석상의 슈트 차림에도 항상 운동화를 신었다고 한다. 패션은 애티튜드다. 그 기사의 제목이었나? 한국말인지 영어인지 모를 이 말이 퍽이나 와 닿았다.



스물여덟, 여전히 어린 티가 많이 남은 채로 입사를 했다. 업무보다 회사 분위기에 적응하는 게 훨씬 힘들었다. 입사 당시만 해도 대부분 직원들이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셔츠와의 매치나, 색감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저 넥타이를 매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분위기였다.


아무리 자유로운 분위기의 회사라도 신입사원들은 초반에 정장 차림을 하는 게 일반적이다. 특히 당시의 사장님은 직원들의 옷차림을 중시했다. 월급에 의복비라도 얹어줄 기세였다. 한벌 두벌, 정장을 사들였다. 한참 유행하던 은갈치 정장도 피할 수 없었다. 회색 정장을 사려고 백화점에 갔는데 모든 매장의 선택지가 은색이었다. 거금을 들여, 게다가 바지는 두벌이나 샀다. 몇 번 입지는 못했다. 은빛 양복은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정말 은갈치 양복밖에 없었다

사장님이 바뀌었고, 주말마다 셔츠를 다리는 일도 귀찮아지고, 넥타이는 점점 더 목을 죄여 왔다. 슬슬 넥타이를 매지 않고 출근했다. 셔츠는 심하게 구겨져 있을 때만 적당히 다림질했다. 잘 보이는 가슴 부분만 다렸다. 유행마저 바뀌고 있었다. 통이 넓은 바지는 점점 촌스러워 보였다. 그래도 새 바지를 장만하지는 않았다. 바지는 재킷보다 금방 떨어져, 하며 매번 두벌씩 장만했던 것이다. 생각보다 쉽게 해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어설픈 차림을 얼마 동안 하고 다녔다. 낙낙한 바지에 구겨진 셔츠. 노타이에 셔츠 맨 위 단추는 열어둔 채. 먼지 쌓인 구두의 굽은 바깥쪽만 뾰족이 닳아 있었다. 옷차림이 어설퍼질수록 회사에 가는 것도 싫어졌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몸에 딱 맞는 옷을 다시 장만하던지, 이 참에 남들 눈치 보지 말고 캐주얼한 옷차림을 할지. 혹은, 회사를 그만두던지. 사표를 내는 건 아무래도 감당이 안되고, 옷을 다시 장만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아무리 새 옷을 산다 한들, 매번 다림질을 하고 드라이클리닝을 맡겨가며 입을 자신도 없었고. 회사를 그만 둘 배짱으로, 상사들 눈치 보지 말고 캐주얼하게 입고 다니기로 결정했다. 뭐, 안 그래도 금요일은 캐주얼 데이라나 뭐라나, 이상한 날을 만들어 다들 어설픈 청바지에 새로 산 운동화를 신고 오니까. 나는 그냥 자체적으로 ‘상시 캐주얼 데이’ 할래. 이 정도 마인드?


물론 아무리 자체 캐주얼 데이라고 해도, 찢어진 청바지나 그래픽이 있는 티셔츠를 입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전히 회사에는 넥타이를 매는 사람이 더 많다. 원래부터 화려한 옷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니 크게 문제 되지는 않았다. 무채색 계열의 면바지와 청바지, 폴로티와 옥스퍼드 셔츠를 사들였다. 회사 앞의 유니클로에 들러 세일할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완벽히 자유로운 복장도 아니고, 상사들의 눈치도 슬슬 봐야 하고, 모든 옷을 한 번에 다 장만할 수도 없는 일이니, 여전히 옷차림은 어딘가 어설펐다. 폴로티도 바지에 넣어서 입어야 하나? 아, 이 남방은 넣어 입으면 왜 이렇게 어색하지? 아직 당당하게 운동화를 신고 출근하기도 애매했다. 구두라 부르기도 뭐하고 스니커즈라 하기도 뭐한 정체가 불분명한 신발을 신었다.


어느 날, 멀지 않은 곳으로 출장을 가는 길, 검정 청바지를 입고 회사차를 운전하고 있었다. 조수석에 앉은 다른 팀의 팀장이 문득 ‘청바지 멋지네’한다. 비꼬려는 의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단순히 친목을 위한 말이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아, 네…’ 적절한 대답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문득 깨달았다. 이미 나는 청바지를 입는 사람이 되었다는 걸. 이미 은 넘었다. 더 이상 애매한 복장을 할 이유가 없다.


그 길로 운동화를 사고 ‘청색’ 청바지도 하나 샀다. 하얀 스니커즈도 신고 검정 러닝화도 신는다. 옷차림이 어색해지지 않을수록, ‘엇, 오늘 금요일도 아닌데 청바지를 입었네, 배짱 좋은데?’라는 말을 들을수록, 이상하게 점점 더 회사가 다닐만한 곳이 된다. 내가 입고 싶은 옷을 입는다는 건 생각보다 직장생활의 만족도에 크게 기여한다.  


패션은 애티튜드다. 나는 회사원이지만 회사원처럼 살지는 않겠다.



표지 이미지 : Hunters Race on Unsplash

이전 22화 스탠다드 커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