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평가하는 잣대는 다분히 자기중심적이다. 청소나 정리정돈을 얼마나 잘하는지와 같은 사소한 생활 습관부터 진보와 보수 같은 정치적·이념적 성향, 더 크게는 사람의 됨됨이까지도 우리는 자기를 기준으로 상대방을 평가한다. ‘나도 그렇게 깔끔한 편은 아닌데, 우리 남편은 정말 지저분해’, ‘나도 보수적이지만 그 사람은 더하더라고’, 더러는 ‘저 인간이랑은 상종을 못하겠네.’, 이런 식으로.
회사에 모든 사안에 비판적인 모 차장님이 계신다. 중소기업이다 보니 대기업에 비해 아무래도 체계가 잘 안 잡혀있고 주먹구구식인 경우가 많다. 춘계 등반대회의 날짜가 직원들끼리 입소문으로만 돌다가 정작 3일 전에 취소되거나, 징검다리 연휴에 휴무를 할지 말지를 연휴의 시작 전날 알려주는 식이다. 연초에 연간계획을 미리 세워놓으면 좋으련만 당최 그게 그렇게 어렵나 보다. 이런 식으로 회사 일 하나하나에 불만이다. 같이 커피를 마시러 가면 대화는 보통 ‘아니,’로 시작된다. ‘아니, 이번 징검다리 연휴에 쉴 거면 미리미리 공지를 해야 직원들이 계획도 세우고…’ 틀린 말도 아니고 나 역시 불만이기는 하지만, 사안마다 그러시니 이제 듣고 있는 것도 좀 피곤하다. 회사가 하루 이틀 그러는 것도 아니고, 10년 넘게 다니셨으면 이제 적응 좀 하세요. 이런 심정.
반면에 이런 사람도 있다. 나보다 세 살 위인 같은 팀 과장. 비록 세 살 차이지만 나와는 사뭇 다르다. 올백머리를 하고 푼수끼가 있으며, 골프를 잘 친다. 그리고 윗사람에게 살살댄다. 주말이면 팀장님들 -우리 팀장뿐 아니라 다른 팀 팀장들도- 과 골프장에 간다. 어르신들 취향에 맞게 머리를 깔끔하고 반지르르하게 넘기고 나타나서 특유의 푼수끼로 립서비스까지 좋을 것이다. 나같이 운동화를 신고 출근하고, 6시 땡 치면 퇴근하는 사람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언제인가 이사님이 팀원들을 불러 간담회를 가졌다. 조직 개편 후 갖는 형식적인 자리였는데, 할 말도 별로 없어서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지루한 시간을 견뎌내고 자리에 돌아오니 내 옆자리에서 한참을 떠들던 그 올백머리가 다가와 말을 건다. ‘이 과장, 이사님한테 무슨 불만 있어? 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어?’ 왜 이럴 때 비위 좀 맞추고 살살대지 않았냐는 뜻이다. ‘너나 잘하세요’가 입 주변에서 맴돈다. 왜 이렇게 알랑거리지 못해 안달이지?
두 사람을 대할 때, 평가의 기준은 역시 나다. 한 사람은 나보다 까칠하니까 너무 고지식하고, 다른 한 사람은 나보다 윗사람에게 잘하니까 아첨꾼이다. 반면 그들에게 나는 너무 조직 순응적이거나, 혹은 너무 눈치를 안 보는 제 멋대로인 사람일 것이다. 이렇듯 나를 기준으로 하는 평가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상황에 따라 달리 적용된다. 더구나 나라는 인간은 허점투성이인 데다가 그때그때 마음이 변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남을 평가하는 기준, 스탠다드로 활용한다.
회사에 작은 카페가 하나 있다. 원래 맥심 믹스커피를 공짜로 마셨는데, 인스턴트커피를 싫어하던 어느 고위직급 간부의 건의로 믹스커피 제공을 중단하고 카페를 만들었다. 아메리카노는 한잔에 900원, 최근에 새로 생긴 메뉴인 솔티드 캐러멜 라테는 2000원. 직원이라 봐야 바리스타 1명이 전부이고, 공간도 넓지 않아 출근 시간인 9시 전후에는 줄을 서서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나는 아침부터 여러 직원과 마주치며 줄을 서있는 것도 멋쩍고 기다리는 시간도 아까워 매일 9시 20분경 카페에 간다. 과음한 다음 날이나 감기가 걸린 날은 다른 음료를 마시지만, 대부분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한다. 썩 훌륭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맛없지도 않은 그저 그런 커피다. 바리스타의 컨디션이나 원두 상태에 따라 조금 더 맛있거나 조금 더 맛이 없는 날도 있다. 그 카페가 생긴 지도 벌써 10년쯤 되었으니 10년간 거의 매일같이 같은 맛의 (혹은 비슷한 맛의) 커피를 마신 것이다.
다양한 커피를 의식해서 맛보거나, 더 깊이 알기 위해 공부를 해본 적은 없다. 에스프레소의 어원이 ‘express’를 뜻하는 이태리어 라거나, 라테가 우유를 의미한다는 상식 수준의 지식만 있을 뿐이다. 그래도 매일 아침 마시는 회사의 커피는 내게 하나의 기준, 스탠다드가 되었다. 가끔 출장 중 들러 잠을 깨기 위해 마시는 고속도로 휴게소의 뜨거운 아메리카노, 여름날 동네 편의점에서 얼음컵에 따라 마시는 1500짜리 설탕 커피, 주말 아침을 책임지는 형형색색의 네스프레소 캡슐. 어떤 경우든 평가기준은 회사 커피다. 어떤 커피가 더 좋고, 맛있는지를 평가하는 건 아니다. 그저 이 커피는 신 맛이 조금 더 강하네, 이 커피는 너무 쓴 맛만 나는데 하는 정도다.
개인적으로 스타벅스 아메리카노는 탄내가 심해서 별로다. 내 주제에 감히 별다방 커피를 논하는 게 우습기도 하지만, 회사 커피만 마시다 가끔 스타벅스를 마시면 탄 냄새가 너무 강하게 느껴진다. 이런 스모키함을 좋아하는 사람이 우리 회사 커피를 마시면 너무 심심하다고 느낄 것이다. 혹은 논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마음에 쏙 드는 커피가 없었던 건 아니다. 그중 단연 기억에 남는 건 지난겨울 이사를 온 날 마셨던 커피. 아파트 단지의 상가에 있는 카페였는데, 포장이사 회사의 직원분들이 짐 정리를 할 때, 시간이 비어 잠깐 쉴 요량으로 들어갔다. 별생각 없이 아메리카노를 주문해 한 모금 마시는데,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입안 가득 퍼지는 부드러움에 고소함과 산미가 잘 어우러졌다고 해야 할까. 그야말로 회사 커피와는 다른 커피. 이사로 지친 몸을 달래줘서 더 훌륭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이밖에도 좋은 커피야 많지만, 그렇다 해서 내 커피의 스탠다드가 상향 조정되지는 않는다. 내게 스타벅스는 그저 로스팅이 너무 강한 커피이다. 좋았던 커피는 그냥 좋았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내가 커피를 판단하는 기준은 여전히, 컵 바닥에 커피가루가 많이 가라앉아 있고, 바디감도 약하며, 내가 좋아하는 산미감도 없는, 900원짜리 회사 커피이다.
실로 빈곤하고 시시한, 허점투성이 스탠다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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