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끝났다. 어벤져스는 엔드게임을 했다. 참여 한번 못해봤는데 축제가 끝난 것이다. 10년 넘게 지속된 전 세계인의 축제가. 2002년, 나만 쏙 빼고 모든 사람이 즐거웠던 그 월드컵처럼.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재미없게 사는 걸로 치면 둘째 가기 서러운 사람이다. 아내가 내 친구에게, 그래도 내가 책 보는 걸 좋아한다고 하자 그 친구는 픽 웃으며 답했다. ‘그거라도 해야지.’
즐겨보는 스포츠가 있기는커녕 어젯밤의 한일전 축구 스코어도 다음날 동료들에게 들어야 안다. 대학 때는 당구도 못 치고 스타(스타크래프트)도 못해서 항상 친구들이 당구나 스타를 끝내고 술을 마시러 가는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다. 그나마 음악은 조금 듣지만, 주변에서 추천해준 앨범-이를테면 루시드폴의 ‘오, 사랑’ 같은-을 몇 개월이고 반복해서 플레이하기 때문에 그리 박식하지는 못하다. 그렇다고 티브이 드라마나 쇼프로를 즐겨보는 것도 아니어서 요즘 유행하는 프로그램이나 잘 나가는 연예인도 잘 알지 못한다. 대체 뭘 하면서 사는 건지 스스로도 미스터리다.
이쯤 해서, ‘아, 맞다, 난 영화를 많이 보지!’라고 하고 싶지만 아쉽게 그조차도 아니다. 데이트를 할 때 종종 극장에 가긴 했지만, 아이가 생기고 나서는 이마저 쉽지 않다. 좋은 영화는 시간이 흐른 뒤에 봐도 좋기 때문에, 놓치고 지나간 영화들이 많이 아쉽지는 않다. 그저 언젠가는 보게 되겠지 하는 생각이다.
그래도 개봉했을 때를 맞춰서 보지 못하면 아쉬운 영화들이 있다. 바로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그리고 어벤져스. 난 이 시리즈의 영화들을 단 한편도 보지 못했다. 해리포터와 반지의 제왕의 첫 번째 편이 개봉됐을 때는 군에 입대하기 직전이라 영화를 챙겨볼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 제대를 했을 때는 이미 두 시리즈 모두 사이좋게 2편까지 상영을 마치고 난 후였다. 2002년 월드컵도 부대 안에 있어서 제대로 보지 못했으니, 이건 그냥 재미없게 살라는 팔자인 것 같다. 제대를 하니 얼마 안가 두 시리즈 모두 또 사이좋게 3편을 개봉한다고 했다. 지금이라도 봐야 할 것 같아 못 봤던 1,2편을 챙겨보려고 했지만, 왠지 김이 빠진 기분이었다.
이들은 영화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 그때그때 챙겨 보지 못하면 여러 가지로 난처하다. 우선 대화에 끼기가 힘들다. 이러한 대형 영화는 많은 사람들이 챙겨보고 대화거리로도 많이 오르내린다. 그런 대화에는 당연히 낄 수 없으니 일단 곤란하다. 그리고 연작물이다 보니 지난 편을 보지 않으면 다음 편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첫 편을 보지 못하고 넘어가면 속편은 도미노로 보지 않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이렇게 자신들의 강력한 세계관을 구축한 영화들은 개봉 당시뿐 아니라, 평소에도 꾸준히 회자되기 때문에 끊임없이 대화거리에 오르고 다른 영화나 책, 예술 작품에 꾸준히 인용된다. 이쯤 되면 21세기를 사는 사람의 필수 교양이라고도 할 만하다. 아무래도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필수적인 교양과목 하나를 이수하지 못한 찝찝한 기분마저 든다.
그리고 어벤져스 시리즈. 아이언맨이 처음 개봉할 때만 해도 어벤져스가 이렇게까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릴지는 몰랐다. 사실 히어로물은 크게 관심이 없었고.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을 보지 않은 이유도 사실은 판타지 장르에 크게 관심이 가지 않아서였을지 모른다. 그런데 어벤져스 시리즈의 거듭되는 성공을 지켜보자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건 봐야 한다.’
그리 놀랍지도 않겠지만 스타워즈 시리즈 또한 한 편도 보지 않았는데, 스타워즈야 미국에서는 몰라도 우리나라는 마니아층이 그리 두터운 편은 아니기 때문에 큰 꺼림칙함은 없었다. 제 아무리 스타워즈가 팝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아임 유어 파더’나 ‘포스’ 같은 말이 일상적으로 쓰인다 한들, 우리나라에서 스타워즈로 깊이 있게 대화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이제 ‘어벤져스’가 나온 것이다. 물론 스타워즈만큼이나 큰 위력을 발휘할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미국뿐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MCU, 마블의 세계관을 확고히 심어준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게다가 수많은 캐릭터 덕분에 이야기의 확정성도 더 무한한 것 같다. 그리고 영화는 현재 진행형이다. 내 딸 세대도 이 시리즈의 영향을 깊게 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벌써부터 사춘기가 된 딸과 대화가 안 통하는 올드한 아빠가 돼버린 것 같다.
아무래도 구식 아빠는 되기 싫어서 IPTV를 켜고 ‘할리우드’나 ‘SF무비’ 섹션에서 리모컨을 이리저리 굴려 보지만, 결국은 ‘노팅힐’이나 ‘500일의 썸머’ 같은 영화를 다시 보면서 낄낄대고 있다. 젠장, 아무래도 난 21세기 문화시민이 되기는 그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