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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이현 Jul 08. 2019

잔스포츠의 로망

1997년은 이스트팩의 해였다. 고 1이었다. 지방 소도시라 서울이나 수도권 지역에 비하면 한참 늦은 유행이었을 것이다. 단순하고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은 ‘백팩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미국에서는  이거 매고 다닌데. 근거 없는 소문도 돌았다. 꼭 사야 했다. 옷이나 신발에 비하면 가방은 부모님께 사달라고 말을 꺼내기 쉬운 아이템이다. 학생이니까 가방은 좋은 걸 메줘야 한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어머니는 없는 살림에도 가방은 제일 비싼 걸로 사주셨다. 말 그림이 있는 조다쉬.


내가 살던 익산에는 아직 이스트팩 매장이 생기지 않았었다. 시외버스를 타고 전주까지 가야 했다는 말이다. 어떻게 찾아가지? 친구들과 의논했다. 교복 입고 오면 안 돼. 사뭇 진지했다. 고민하던 차, 마침 익산 시내에도 이스트팩 매장이 문을 열었다. 풍선으로 장식된 문을 열고 들어가 올리브색을 골랐다. 미국에서 왔다는 가방 매장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러니까, 이게 조다쉬입니다


대학에 가서는 다 떨어진 이스트팩을 버리고 빨간 노스페이스를 멨다. 작은 배낭이었다. 몇 년 뒤, 군대를 제대하니 남학생 등에는 온통 검정 노스페이스가 메여 있었다. 내 빨간 가방이 가벼운 트레킹 용이었다면, 다들 본격 등반용 가방 느낌이었다. 옆주머니에는 작은 우산이 꽂혀 있었다. 조금 이상한 유행이었다. 더 이상한 유행은 일명 ‘테크노 가방’이라 불렸던, 플라스틱 재질의 커다란 가방이었다. 대체 무천도사가 매고 다니는 거북이 등딱지 같은 가방을 왜 메는 거지?


가볍고 튼튼한 이스트팩과 노스페이스의 백팩을 연달아 매면서, 가벼운 백팩(‘쌕’이라고 불러야 왠지 더 어울리는)을 좋아하게 됐다. 그렇게 ‘잔스포츠’에 대한 로망이 생겼다. 사실 오래된 로망이었다. 이스트팩을 샀을 때, 다시 이런 소문이 돌았던 것이다. ‘미국애들한테 인기 있는 건 이스트팩이 아니고 잔스포츠래.’ 실컷 새 가방 장만했는데 잔스포츠는 또 뭐야? 게다가 왠지 더 괜찮아 보이잖아? 마침 티브이에서 쥬라기 공원 1을 다시 방영했다. 주인공 소년이 계속 매고 다니던 가방이 잔스포츠였다. 조금만 일찍 알았다면 이걸 샀을 텐데… 이렇게 매지 못한 잔스포츠에 대한 로망을 사십을 바라보는 지금에도 버리지 못한다.


나만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어느 날 와이프 친구가 집에 놀러 왔다. 6살 된 딸이 심심할까 봐 스케치북이며 색연필, 색종이를 가방에 잔뜩 싸왔다. 검은색 잔스포츠였다. ‘나 잔스포츠 한번 매보고 싶었거든. 이번에 하나 장만했어.’ 얼마 전에는 친구와 파주에 다녀올 일이 있었다. 무슨 얘기를 하다 나왔는지 모르겠다. 돌아오는 컴컴한 고속도로 위에서 그 친구가 말했다.  ‘난 잔스포츠가 이쁘더라.’ 그러니까, 1997년 전후에 학창 시절을 보낸, 지금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사람들에는 아마도 잔스포츠에 대한 로망 혹은 미련이 남아있나 보다.



취업을 했을 때, 친구에게 서류가방을 선물 받았다. 진 브라운의 묵직한 소가죽 쌤소나이트. 회사 생활 첫 2, 3년간 정장 차림으로 매일 같이 들고 다녔다. 튼튼한 가죽 가방은 무거웠다. 들어있는 게 지갑밖에 없을 때도 무거웠다. 회사에서의 옷차림은 점차 캐주얼하게 바뀌었다. 가볍고 두 손이 자유로운 백팩이 간절했다. 잔스포츠를 하나 살까?


이번에도 사지 못했다. 칸켄이라는 새로운 가방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아담한 사이즈다. 산지 얼마 되지 않아 국민 기저귀 가방이 돼버렸지만 어쩔 수 없지, 꿋꿋이 맸다. 그런데 회사 사람들이 가방을 보면 한 마디씩 한다. ‘어, 이거 우리 와이프 기저귀 가방인데.’, ‘응? 이거 우리 초등학생 아들 가방이랑 똑같네?’.

회사에 가방 자체를 잘 매고 가지 않는 쪽을 택했다. 들고 다닐 것도 별로 없다. 퇴근을 할 때 종종 이런 얘기를 듣는다. ‘그렇게 출근한 거야?’ 가방 없이 터덜터덜 출퇴근하는 모습은 아직은 내게도 좀 낯설다.


칸켄. 출퇴근용으로는 좀 그런가요?

노트북을 들고 출장을 가는 일이 잦아지면서, 좀 더 큰 백팩을 사기로 마음먹었다. 다들 매고 다니는 각진 회사원 가방은 내키지 않는다. 이번에야 말로 잔스포츠를 살 것인가. 고민 끝에, 그리고 검색 끝에, '존 피터'라는 또 다른 미국 브랜드의 가방을 질렀다. 방수가 잘되고 튼튼한 재질의 천으로 만든 가방이다. 너무 흐물거리지도 않고, 브랜드명이 너무 눈에 띄지도 않는다. 안 그래도 회사에서 나 홀로 캐주얼한 옷차림이 부담인데, 가방이라도 너무 배낭 같아 보이지 않는 게 낫겠지. 무엇보다 잔스포츠를 매면  이런 소리를 들을 것 같다. ‘응? 이거 나 고등학교 때 매던 건데?’, ‘어? 이거 우리 중학생 아들 가방이랑 똑같네?’

 

언젠가 내가 ‘패션은 애티튜드’라고 했던가. 사실 회사 생활에는 가끔, 타협도 필요하다.     



본문 이미지(칸켄) : Florian Weichelt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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