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이현 Oct 26. 2019

서른아홉 소년

에필로그



스물둘. 군대를 가기 전에 가장 걱정스러웠던 건 여성관의 변화였다. 여성관, 자주 쓰는 말은 아니지만 아무튼, 여자를 성적 대상으로만 바라보게 될까 두려웠다는 말이다. 


잤냐?

대학 시절, 여자 친구가 생겼다고 하면 의례 듣는 질문이었다. 가깝게 지내는 친구들이 이런 저급한 질문을 던지지는 않았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가까워 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남자들의 모임에 가면 어쩔 수 없이 종종 들을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이런 질문 앞에서는 대략 난감해졌다. 정색하면서 그딴 걸 물어보냐고 하기에는 그 분위기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고, 그렇다고 낄낄대며 내 여자 친구를 술자리 농거리로 삼고 싶지도 않았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이럴진대, 군대에서는 어떡한단 말인가.  


야, 신병.

네. 이병 이이현.

여자 친구 있어?

네, 그렇습니다.

이뻐?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사진 있어? 사진 좀 줘봐.

(사진을 보고) 얼~ 이쁘네. 잤냐?

……


일병이 되고 후임이 둘 정도 들어오고 나서야 이런 저질의 대화에서 겨우 해방될 수 있었다. 그리고 다행히 제대를 할 때까지 내 여성관이 바뀌지는 않았다. 군대가 아무리 우악스러운 곳이라 해도, 가치관까지 흔들릴 정도는 아니었다. 더구나, 고작 2년이었으니까. 2년 정도로 흔들릴 수는 없었다.

남자들이란...

스물여덞, 가까스로 취업을 했다. 이번에는 군대와 달리 내 발로 걸어서 들어갔다. 사실 걸어 들어갔다는 건 좀 점잖은 표현이고, 나 좀 뽑아달라고 구걸을 해가며 들어간 곳이다. 그런데도 참 심란하고 두려웠다. 또 여성관이 변할까 봐 두려웠던 건 물론 아니었다. 문제는 뭐가 그렇게 심란하고 두려운 건지 대체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번엔 2년이라는 끝이 있지도 않았다. 


무작정 책을 읽고, 신문을 봤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내가 해야 할 일이 뭔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과연 무엇인지의 고민들. 한 발 늦은 타이밍이었다. 이미 졸업은 했고, 더 이상 부모님께 손을 벌릴 수는 없었으니까. 이제 곧 결혼도 해야 할 것이고, 거실과 주방이 있는 아파트로 이사도 가야 할 것이었다.


의미 없는 고민을 잔뜩 끌어 안기만 할 뿐, 무엇하나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대신 매일같이 출근을 했다. 매일같이 출근을 한다고?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학교 다닐 때도 개근상은 놓친 적이 없었으니까. 매여 있는 곳을 일탈해 다른 일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것보다는 훨씬 쉬웠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가 심란했던 이유는 이대로 어른이 되어버려야 한다는 아쉬움 때문이었다. 말 잘 듣는 착한 장남의 역할, 있는 듯 없는 듯 말썽 없이 지내는 모범생 역할을 하다가 저물어 버린 내 유년기와 청춘에 대한 미련이었다.  


사촌들과 헤어지기 싫다고 생떼를 부려보지도, 계속 그림을 그리겠다고 고집을 피워보지도, 엄마 몰래 오락실에 다니다 죽도록 맞아보지도, 유행하던 나이키 농구화를 사달라는 말을 꺼내보지도, 못난 운동 신경 때문에 농구 한게임 제대로 뛰어보지도, 야자 시간에 친구들과 땡땡이 한번 쳐보지도 못했던, 한심했던 내 과거에 대한 미련 말이다. 


문득 이러한 이야기들을 써봐야겠다는 마음이 생긴 것은 곧, 이러한 부질없는 미련에서 한 발짝 벗어났다는 걸 의미했다. 이미 나는 닳고 닳아 누렇게 바랜 와이셔츠 목깃의 세계에 속해있다. 나는 더 이상 소년이 아니다. 서른아홉에 소년이라니, 가당치도 않다.  

이전 25화 샌들에 양말 신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