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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딸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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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이현 Aug 09. 2019

파도에 맞선 어설픈 가족

워터파크에서 생긴 일


  나는 좀, 어설픈 아빠다. 사실, 아빠로서만 어설픈 건 아니고, 전반적으로 어설픈 면이 많다. 어렸을 때, 심부름을 하면 뭔가 꼭 하나씩 빠뜨리거나 잘못했다. 두부와 콩나물을 사 오랬는데, 두부 한모만 덜렁 사 오거나, 라면 3개를 사 오랬는데 세 종류의 다른 라면을 사 오거나, 이런 식이다. 지우개나 우산은 제대로 챙길 때 보다 잃어버릴 때가 더 많았고, 동네에서 놀 때 나보다 키가 큰 아이한테는 형이라고 불렀다.

  중·고등학교 때 중간, 기말고사 기간이 되면 며칠 전부터 분단위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은 대부분 지켜지지 않아 다시 계획을 수정하면서 시험 기간을 보냈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아주 계획 같은 건 세우지 않는다. 여행을 갈 때도 마찬가지인데, 이 경향은 딸이 태어난 후로 더욱 심해졌다. 어린아이와 여행을 가면 변수가 너무 많기 때문에 계획 따위는 더욱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더구나 딸아이는 호텔 수영장에서 노는 걸 가장 좋아해, 구경하기 위한 여행은 이제 잘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계획을 세워도, 세우지 않아도 뭔가 빠뜨리고 어설픈 것은 피차 매한가지다.


  지난 주말에는 오션월드에 다녀왔다. 우연히 회사의 하계 휴양지에 당첨이 되었다. 홍천의 리조트에서 2박 3일간 묶는 일정이었다. 물론 아무런 계획은 없었다. 해외여행을 갈 때도 무계획인데, 차로 1시간 반 걸리는 여행에 계획 따위가 있을 리 없다. 게다가, 오션월드다. 하루는 어차피 워터파크에서 보낼 것이다.

  토요일, 리조트에는 3시쯤 도착했다. 그날 밤 잔디광장에서 퀸 노래의 오케스트라 무료 공연이 있었다. 러키. 오늘 저녁 할 일이 생겼다. 공연이 끝나면 불꽃놀이까지 한단다. 무계획으로 온 것 치고는 꽤, 괜찮은 첫날밤을 보냈다.

  다음 날은 종일 워터파크에서 보냈다. 수영하기 좋은 날이었다. 그리고 이 날은, 아내의 사촌언니-그러니까 내게는 처형- 가족과 만나기로 돼있었다. 우연히 여행 일정이 하루 차로 겹쳐있었다. 처형네에는 세 살짜리 조카가 있어, 딸은 육촌 동생을 만날 일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 실컷 수영을 하고 그들과 저녁시간을 함께 보냈다.

  ‘여기, 양 떼 목장이 있다던데.’ 처형이 얘기했다. ‘응? 그런 게 있다고요?’ 겨울에는 스키장인 이 리조트에서는 사시사철 곤돌라를 운행한다. 이걸 타고 산 위로 올라가면 양을 풀어놓은 곳이 있다는 말이었다. 물론 나와 우리 가족은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다음 날, 집으로 돌아가기 전 처형네 가족과 곤돌라를 타고 양 떼 목장에 갔다.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체크 아웃을 하고 아무런 일정 없는 그저 그런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어설픈 아빠의 두 번째 행운이었다.

무료공연 팸플릿


  사실, 워터파크에서 안경을 잃어버렸다. 파도풀에서였다. 워터파크 입구 근처의 유아풀에서 잠깐 물을 묻히고 다른 곳에 가보자 하고 걸었는데, 커다란 파도풀이 나타났다. 파도풀 밖에서 보면 파도가 일어날 때 저 멀리 집채만 한 파도가 올라오고, 그 위에 구명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둥둥 떠서 떠밀려 오는 게 보인다. 물 위의 엄청난 인파와, 그보다 더 엄청나게 높이 솟는 파도의 모습은 가히 장관이다.

  그 모습을 본 딸아이가 선뜻 들어가 보자고 했다. ‘응? 들어가자고?’ 무서워서 안 들어간다고 할지 알았는데 좀 의외였다. 들어가도 되나… 약간 갸우뚱했지만, 선뜻 가자는 아이에게 겁부터 주기는 싫었다. 물론 깊은 곳까지 들어가지는 않았다. 안전요원들이 호루라기를 불며 막고 서 있는 지점 바깥쪽에 우리 세 가족은 나란히 섰다. 저 멀리 거대한 파도가 올라왔다. 산봉우리처럼 솟아오르는 물결을 보고 딸아이는 맞설 준비를 했다. 그러니까, 출발선에 선 스프린터마냥 무릎을 구부리고 허리를 숙였다. ‘응? 이런 포즈가 괜찮은 건가?’ 싶었지만 아내와 나는 얼결에 딸아이를 따라 했다. 파도가 다가왔다. 저 멀리 고요하게 솟아올랐던 봉우리는 우리가 선 곳에서 산산조각 나며 거칠게 우리를 집어삼켰다.

  ‘뽀글뽀글뽀글’ 우리 셋은 파도의 부서지기 직전 마지막 에너지를 온몸으로 맞으며 뒤로 밀려났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갑작스레 덮친 파도 속에서는 딸을 보호하고 말고 할 수도 없었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아야 했고, 사정없이 내리치는 파도 뒤로 밀려나며 균형을 잃지 않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이 정도 수압에서 인간이란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존재다. 순식간에 파도가 지나가고, 손으로 얼굴을 닦으며 눈을 떠서 딸을 바라봤다. 다행히 내 옆자리에 서있었다. ‘방금 이거 뭐였지’하는 멍한 표정이었다. 울지는 않았다. 나는 내심 아무렇지 않은 척, ‘재밌었지!’라고 하며 딸아이의 눈치를 살폈다. 여전히 멍한 표정이다. 그 순간 쓰고 있던 안경이 없어진 걸 알았다. 모자가 없어진 것까지 눈치채기에는 정신이 온전치 않았다. 다행히 모자는 뒤에 서있던 어떤 아주머니가 주어주셨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한참을 물 바닥을 보며 안경을 찾았다.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결국 찾지 못하고 돌아가니 딸아이는 자신을 덮쳤던 파도에 놀란 것 보다도, 아빠가 안경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이 더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8살은 하루하루가 다르게 의젓해진다.


  뭐 어쩔 수 없지. 다행히 내 선글라스는 도수가 있다. 내일 집에 돌아갈 때까지 선글라스를 끼면 된다. 하하. 이거라도 있어서 다행이네. 파도풀에서 벗어나, 어린이 미끄럼틀이 있는 풀에서 한참을 놀았다. 나는 파도에 당했던 일이 문득 억울해져서, 혼자 다시 파도풀에 들어갔다. 인파를 헤치며 낑낑 헤엄을 쳐 제일 깊은 곳까지 당도했다.

  그곳은 오히려 평온했다. 멀리서 보면 집채만 한 파도지만, 그곳에서는 그저 안락한 구명조끼 안에서 수위가 높아지면 높아지는대로 둥둥 떠다니면 되는 것이다. 아, 이것도 모르고 어설프게 끄트머리 부분 파도가 제일 센 곳에서, 물에 뜰 준비를 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파도를 이기려는 동작을 취했으니…

  어설픈 아빠 덕에, 우리 가족은 파도에 제대로 한방 맞았다.

이 정도 강도에 제대로 한방 맞았다


표지 사진, 본문 사진 출처 : 오션월드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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