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선발고사를 보고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주변에서 유일한 고등학교 비평준화 지역이었고 기숙사도 있었기 때문에, 나름 각 지방의 수재들이 모여드는 학교였다. 중학교 때 전교에서 12등이던 등수는 고등학교에서 반에서 21등으로 떨어졌다. 한 반에 마흔몇 명정도 있었으니 정확히 중간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주변에 서울대와 연고대를 간 친구들이 상당히 많은데, 그들의 면면을 분석하면 -물론 객관적이지는 않지만- 서울대와 연고대를 가르는 기준이 명확해진다. 내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머리도 좋고 노력도 하면 서울대, 둘 중 하나, 그러니까 머리는 좋은데 노력은 별로 안 하던지 머리는 많이 좋지 않지만 노력을 많이 하면 연고대까지는 갈 수 있다. 대학이 서열화되는 게 반갑지는 않지만 현실이 그렇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서울대나 연고대 모두 아니다.
친한 친구들은 죄다 ‘머리형’이다. 공부에 크게 뜻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데 다들 좋은 학교에 턱턱 잘도 들어갔다. 얼마 전 그들과 술을 마셨다. 누군가 PSAT(공직 적격성 평가)에서 1번으로 나왔던 문제를 냈고, 다들 요리조리 생각을 하면서 그 문제를 풀었다. 30분가량을 그 문제 풀이로만 보낸 것 같다. 꼭 뇌섹남들이 나와 퀴즈를 푸는 프로그램을 보는 것 같았다. 물론 매번 있는 일은 아니다. 나는 일찌감치 푸는 걸 포기하고 듣고만 있었다. ‘종이랑 연필 없이 이 문제를 푼다고?’라는 말만 반복하면서.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머리형도 노력형도 아닌 ‘운이 좋은 형’이다. 특별히 머리가 좋은 편도 아니고 노력을 열심히 하지도 않는다. 성적에 비해 딱히 좋은 대학에 진학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삶 전반에 큰 굴곡이 없다. 원하던 대학에 가지 못하면, 다른 학교에 입학을 해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 수능을 준비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수능 결과를 보고 잠깐 재수를 할 까도 했으나 이내 마음을 접고 점수에 맞는 학교에 입학했다. 학교는 만족스러웠다. 네임 밸류가 좋은 학교도 아니고, 캠퍼스는 건대 호수에 들어갈 만큼 작고, 전철역도 멀고, 학교 주변에 번화가도 없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공기도 좋고 아담하고 예쁜 캠퍼스가 마음에 들었다. 더욱이 다시 입시 준비를 하는 것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고.
학부 4년을 별다른 노력 없이 허송세월 한 덕에 졸업 후 1년간 취업 재수를 해야 했다. 1년간 공부를 하고 원래 가고 싶던 회사의 최종 면접에서 탈락했다. 이제 어쩌나 하고 있을 때, 우연찮게 지금 다니는 회사의 신입 사원 모집 공고를 발견했다. 입사 지원 마감일 딱 하루 전 날 밤이었다. 급하게 미리 작성해 둔 다른 회사의 자기소개서에 회사 이름만 바꾼 뒤 원서를 접수했다. 특기란을 채울 게 마땅치 않아 ‘노래 부르기’라고 쓴 탓에 면접관들 앞에서 노래도 불러야 했다. 노사연의 ‘만남’을 불렀다. 썩 잘 부르지는 못했다. 그래도 운이 좋게 합격해서 -나와 경합하던 영어를 매우 잘하던 지원자는 경영직군으로 발탁되었다- 지금껏 다니고 있다. 누구나 알만한 대기업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기업의 경력직들이 종종 우리 회사로 옮겨오는 걸 보면 그렇게 나쁜 조건의 회사는 아닌 것 같다.
‘메모리 게임’이라는 보드게임이 있다. 서로 같은 그림이 한쌍씩 있는 여러 종류의 카드를 뒤집어 펼쳐 놓고, 2장씩 카드를 펼쳐서 같은 그림을 찾아내는 게임이다. 같은 그림이 아닐 경우 무슨 그림인지 확인하고 다시 뒤집어 놓기 때문에, 한 번 본 카드를 잘 기억하고 있는 게 중요하다. 우리 집에 있는 건 카드가 24장이다. 딸이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자주 했는데, 딸의 실력이 나날이 늘고 있다. 퇴근 후 저녁을 먹고 이 게임을 하면 머리가 멍하기도 하고, 굳이 여기에까지 집중력을 발휘하고 싶지는 않다. 딸을 꼭 이겨야겠다는 마음도 없고. 그런데 사실 이 게임의 승패가 꼭 기억력으로만 판가름 나지는 않는다. 아무 생각 없이 뒤집은 카드가 우연히 들어맞기도 하고, 게임 후반, 카드가 8장쯤 남았을 때 남은 8장을 싹쓸이하는 경우도 흔하다.
며칠 전 이 게임을 하면서 딸과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애써 카드 그림을 기억하려고 하지 않아. 그냥 운으로 찾는 거야.”
이렇게 얘기하면 어린 딸은 바짝 약이 오른다. 운으로만 찾는다면서 상당히 자주 이겨버리니까. 어린 딸에게 세상 일이란 게 항상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니 승패에 너무 연연치 말라는 걸 알려주는 나만의 방법이다. 뭐, 꿈보다 해몽이긴 하지만.
이 말을 들은 아내는 또 이런다.
“나를 만난 걸 보면 운이 좋은 게 맞지. 보통 운이 아니야.”
아내의 방이 지저분하다는 얘기는 결혼 전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다. 물건을 험하게 다뤄 나를 만나기 얼마 전에 샀다는 지갑은 내가 10년째 들고 다니던 지갑보다 낡아 보였다. 크게 상관없었다. 나도 많이 깔끔한 편은 아니니까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결혼을 하니 정리되지 않은 옷장과 신발장에 적응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딱 이 정도다. 내가 불편한 점은. 정리되지 않은 옷장과 신발장.
반면 아내가 나를 견뎌야 하는 부분은 사뭇 무겁다. 걸핏하면 회사에 다니기 싫다고 하고, 집에 있는 화분 하나 못 키우는 인간이 귀농 이야기를 하지 않나, 이도 저도 안되니까 이민을 간답시고 영어공부를 하는 나. 유치원 갈 나이도 되지 않은 딸과 고군분투 중임에도 아내는 이런 내 투정을 다 받아주었다. 그렇게 힘들면 그만두라고, 굶기야 하겠느냐고 했고, 이민을 가자는 말에는 영어 한마디 못하지만 그래도 외국에서 한 번 살아보지 하며 동의해줬다. 귀농에는 갸우뚱 이었다. ‘나는 시골에서는 못 살아.’ 생각해보니 나도 시골에서는 못 살 것 같았다.
이리저리 재보기만 하고, 최악의 경우를 먼저 생각하고, 틈틈이 영어공부를 하기에는 의지박약인 내가 회사를 그만두거나 이민을 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내의 이해가 없었다면 내 생활은 훨씬 퍽퍽했을 것이다.
“맞아, 난 참 운이 좋은 남자야”
흔쾌히 동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