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할 때 자유로움을 느낀다. 알아차림도 용이해진다. 차 안은 나만의 공간이다. 마치 나의 세계인듯 포근하고 고요할 수가 없다. 운전을 좋아하는 이유도 그 공간안에서 주는 안락함과 평온, 그 공간 그 시간 안에서만큼은 자유로워짐을 느끼기 때문이다. 집과는 또 다른 이동적 공간의 이점이 있다. 어떤 상념도 일순간 사라지기도, 걷기처럼 생각이 걷히고 맑게 개인다. 운전을 하다가도 문득 내 반경 안의 차 내부를 쓰다듬으며 "오늘도 고마워, 잘부탁해."라고 말한다. 모든 것은 기의 파동, 에너지 파동, 기운의 작용이라고 생각하면 절로 그리 행동하고 말하게 되는 것이 있다.
나이 들어갈수록 배움의 열망이 커진다. 그 배움이란 답을 찾기 위한 거라기보다 그저 알고 싶고 궁금한, 절로 끄덕이게 되는 것들이다. 지성과 지혜, 통찰, 보이지 않는 것들, 당연하게 생각했던 기존의 기계론적 사고관에서 탈피해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 고전을 읽으면 읽을수록 더 많은 고전을 읽고 싶어지듯 알게 될수록 무릎을 칠만큼 경이로움과 소름돋음이 있다. 자연의 정교함, 자연의 오차없음, 필연과 우연의 경험은 나의 내면을 더욱 확장시킨다. 그래서 마흔에 접어든 지금, 나의 중년과 노년은 지성의 배움과 확장이 주된 즐거움이자 지적 놀이가 되지 않을까 싶다.
조금 전 눈이 다 녹지 않은 길을 걸어왔다. 운동화 밑창과 눈의 맞닿음, 뽀드득 뽀드득나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그렇게 내 발자국도 보고 걸으면서 찰나 걷고 있는 나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햇볕이 비치지 않는 곳과 햇볕에 눈이 다 녹아내려 언제 눈이 왔냐는 듯 깨끗한 풍경이 대비돼 하얀눈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주말 장을 보고선 즉흥적으로 차를 돌려 외곽으로 드라이브를 했다. 내가 종종 드라이브에 나서는 루트인데 오며가며 왕복 40분 정도 되는 거리다. 어떤 목적지를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해둔 한 곳을 기점으로 오는 길 가는 길을 그 자연을 만끽하기 위해서다. 홀로 나서는 그 길에 내 생각과 감정이 내가 아니란 걸 나는 그 적막과 고요함 속에 내맡겨 알아차린다.
잔잔한 음악에 문을 살짝 연 채 외곽 시골길을 따라 걷는 그 길이 내겐 큰 위로가 되어준다. 저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와 나무는, 자연은 말이 없되 그래서 역설적으로 내게 큰 위안이 되는 것이다. 이토록 고요한 시골길을 따라 걸으면 절로 독백하게 된다. 그것은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흐름이랄까. 절로 이는 것이다. 내가 나에게 하는 가장 강력한 긍정의 메시지, 내 안의 나를 위로하는 따뜻한 위로, 용기의 말들이 대부분이다. 그렇게 하고 도심속 도로에 접어드는 순간 마치 시공간을 초월해 잠시 다른 세계에 다녀온 듯한 기시감과 명확한 현실직시가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무언가 꽉 막힌 듯한, 사방이 꽉 막힌 듯한 답답함과 우울감이 밀려오곤 하는데 그 생각도 그 감정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자유의지가 아니니 이제는 그러려니 하는 무덤덤함과 시크함도 생겼다.
어릴적엔, 그래보아야 20대, 30대 초반만 하더라도 나는 늘 내가 누구인지, 이 생각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했고 답답했다. 내가 왜 이토록 감정적으로 불안해하고 힘들어하는지. 내 생각이 날 분명 괴롭힌다는 것을 알겠으면서도, 뇌의 작용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도 있었다. 지독한 내 나름의 삶의 힘겨움과 괴로움과 우울을 겪고 나서야, 나는 그 과정을 반드시 겪어야 됐어야 했구나, 그 과정을 통과해야만 알게 되는 영혼이었구나. 사람이었구나를 알게 되었다. 장의 건강이 내 정신상태와 정신건강과 직결된다는 걸 알게 된 뒤 나는 좀 덜 먹고 내게 잘 맞는, 먹으면 편안한 음식을 찾게 되었다. 살아있다는 건 몸이 움직인다는 것 아니겠는가.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멈추면 정신도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다.
30대 초반 여행을 자주 다녔을 때를 상기해보면, 여전히 기억에 남는 장소들이란 중세시대 그대로 시간이 멈춘 듯한 도시 톨레도, 프랑스의 시골 이런 곳들이다. 서양사를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우리나라의 시골풍경과는 분위기나 바이브가 다른 유럽의 시골풍경을 좋아한다. 마치 나 자신이 그 시대로 돌아가 있는 듯한 기분이 있고 아름다운 수풀과 산책로와 공원이 주는 한적함과 고요함과 자연의 아름다움이 있다. 공원 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 사람들, 잔디밭에 털석 누워 책을 보는 사람들 푸른 하늘 위 솜사탕 같은 뭉게구름을 보고 있자면 살아있음에 매우 감사하게 된다.
서른 초반 길을 잃어 방황하던 시절 나는 무엇을 붙잡고 싶어, 붙잡으려 그렇게 해외 여행을 떠났던지. 확실히 알게 된 건 여행이 내게 꼭 어떤 해답을 주는 것은 아니다라는 점이다. 결국 내 안에서 찾는 것임을. 어찌보면 당시 나의 잦은 여행은 나 자신이 살기 위한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 환경을 바꿔 어떻게서든 기운을 변화시켜보려는 나의 처절한 몸부림이기도 했으니까. 또 그때의 여행이 주는 낭만과 추억이, 풍경이 이따금씩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날 웃게 하니까. 미소짓게 하니까.
사실 여전히 모르겠다. 모르겠다가 맞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흔이 되었어도 나는 여전히 불안하고 우울해하기를 그러다 알아차리기를 반복한다. 이것이 인간의 생이겠지 싶으면서 이전만큼 자기 비난과 자책을 하지 않는다. 어떤 한 일이 트리거가 돼 불안해질 때가 있다. 그러면 무얼 하기보단 가만히 앉아 있는 연습을 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내게 일어난 불안이라는 감정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는 것이 된다. 살아보니 인간은 자신의 불안과 두려움을 다루는 삶의 기술이랄까. 지혜를 자기 만의 방식으로 터득하게 되는 것이구나.하는 것이 있다. 그것이 그 자신의 생존방식이기도.
가볍게 살고 싶은데 가볍게 툭툭 털어내는 삶을 살고 싶은데 그러자! 용기내면서도 삶의 현실 앞에 고꾸라지기를 반복하지만 이런 나를 내가 내치면 어떡하나.한다. 결국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나 자신이니까. 내가 믿을 사람은 결국 나 자신 밖에 없으니까, 이런 나를 끝까지 놓지 않고 살아야 하는 것이, 경험해야 하는 것이 나의 숙명이니까. 나의 독백은 늘 이런식으로 점철된다. 깊어지고 깊어져라, 농밀해지고 농후해져라, 자기 돌파를 통해 나 자체가 행복임을, 사랑임을 알아차리면 되는 것이다.
주말 홀로한 시골길 드라이브길을 떠올리다 늘 그렇듯 인간과 삶, 자기 자신에 대한 사유와 사색으로 이어졌다. 절로 이리 되는 그 흐름에 나는 그저 감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