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가슴살 큐민 덮밥
잘 먹고 잘 자고 명상과 운동을 통해 내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는 일은 곧 나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고 나 자신에게 친절한 일이고 나 자신을 보호하는 일이고 나 자신을 돌보는 일이고 나 자신을 아끼는 일이고 나 자신을 지키는 일이다.
언제부터인가 옷 소비가 확 줄었는데, 있는 옷을 잘 입자.는 생각과 같은 옷을 입어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신경쓰이지 않는다.는 마음이 있어서다. 남의 시선이나 눈에 관심없다.는 게 맞다.
이젠 옷을 살 때도, 입을 때, 내가 어떻게 하면 예뻐 보일까. 아름다워 보일까.가 아닌, 내 스스로가 가장 편안해 하는 옷.을 입는다. 옷을 고를 때도 어김없이 내 스타일의, 내 취향의 것들로 고른다. 그러곤 시간이 흘러도 잘 입고 싶은 마음을 갖는다.
대신 어떤 옷을 입어도, 초라해보이지는 않게 몸과 마음, 그리고 분위기를 가꾸는 일엔 부지런하다.
몸무게도 내가 가장 편안한 상태, 가벼운 상태일 때를 유지한다.
내게 몸무게란, 수치가 아니라 철저하게 내 몸이 편안한 상태, 내 정신건강에 가장 바람직한 상태다.
지금 내 옷장엔 서른 후반의 여자가 살아온 옷장이라고 하기엔, 그녀의 삶이 흔적이 이리도 단출할 수가 없다. 많이 버렸다. 간결해지길 원했고 단출해지길 원했던 때와 일치한다.
단지 내 옷가지나 신발, 살림살이가 이렇게 단출하게 된 데에는 어떠한 거창한 삶의 철학이 있어서라기 보다,
내 환경과 내 의식과 내 마음가짐과 내 태도, 내 상태의 반영이었다.
최근 몇 년 새.
무던하게, 무심하게 살아오는 날 보면서,
많은 것들에 참 무심하게 된 내 스스로를 지켜보면서,
지금의 나의 이런 변화가 반갑기만 하다.
사소하지만 소소하게, 수수하게, 단출하게, 소박하게,
비교 없이, 나에 기대어, 나 자신으로 살아가고 싶다.
나이가 뭐 대수인가. 싶지만 서른 중반이 되어보니 내 바람과는 상관없이 대수 일때가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 젊음도 확실히 적확한 때가 있긴 있다.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건,
바라볼 수 있게 됐다는 건,
스스로에겐 참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를 알아야 감사할 수 있고,
인정할 수 있고,
수용할 수 있고,
포용할 수 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험난한 정글 같은 세상에서 나 자신을 지키는 일이란,
곧 나를 안다.는 의미와 같다.
이젠 나도 나를 조금은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모르는 것 투성이라는 것을 나는 인정해야만 했다.
삶은 늘 그렇듯,
결코 호락호락하지도 친절하지도 않다.
아직도 대서양이라는 바다 한가운데에 정처 없이 떠있는 배처럼 나는 그리고 내 인생은 여전히 방황 중이다.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 내 자아와 사투를 벌인다.
내 자아란, 강력한 것이어서 쉽게 져주거나 물러가지 않는다.
결국 그 끝에 내게 깨달음이라는 선물을 주고 쿨하게 떠난다.
나는 이런 흐름이 아직도 적응이 잘 되지 않을 때가 많다는 걸 시인한다.
내 삶의 태도와 가치관이 가끔은 내 행동과 내 이상과 괴리가 벌어질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면 난 아주 잠시 혹은 꽤 한동안 바다 밑으로 깊숙이 가라앉고 마는데, 돌이켜보면 나의 가치와 나의 용도를 내가 아닌 남과 비교했을 때, 남들이 바라보는 시선과 기준으로 철저하게 남이 바라보는 나.로 나를 판단할 때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래도 지금은 이를 바삐 알아차린다는 점에서 이전과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이라 할 수 있다.
나의 가치. 나의 용도는 나.는 누구인가. 내가 나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내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가 되어야 한다.
순수하게 나는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가 핵심이다.
남들에게 하는 친절함과 배려를 내 스스로에게는 과연 얼마만큼 하고 있는가.
무엇보다 내 자신에게 가장 먼저 친절하고 상냥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나를 한없이 책망하거나 야단한다면 과연 나는 온전할까.
늘 하는 말이라 참 끌리셰하지만 내가 나를 사랑해주지 않으면 누가 나를 아껴주고 사랑해주나.싶다.
나의 가치는 내가 결정하겠다.
어느 선택이건 그 우선 순위는 반드시 내가 될 것.
나다울 것.
나답게 살 수 있는 것일 것.
나를 기분 좋게 하는 일일 것.
내 스스로를 속이지 말 것.
나는 그렇게 나를 자책했다 다시 달랬다가를 반복하며 하루하루 견뎌내고 살아내고 있다.
너를 위한 것,
네가 행복해지기 위해 나는 좋은 선택을 할 것이다.
더 나은 선택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