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은 채워짐이다
간소함. 단출함은 현재 내 삶의 태도이자 자세다.
서른 후반의 나이치곤 살림살이가 한 눈에 들어올 만큼 단출한 편이다. 어떨 땐 이토록 없을 수 있을까.싶을 정도의 정돈된, 정리된 집에서 살고 있다.
내 방, 내 집의 주인은 오롯이 나.다. 지극히 개인적인, 사적인, 내 취향의 물건들의 향연이다. 비워짐과 채워짐의 균형.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다.
요리를 하다 보니 그릇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있는데 이는 필연이다. 흙으로 빚은 도자기나 울퉁불퉁하고 투박한 제 멋대로 모양의 그릇, 꺼끌꺼끌한 텍스쳐와 왠지 잘못 만들어진 것 같은 하자가 있는 듯한 그릇을 좋아한다.
화려한 색감이나 무늬가 있는 것들보다는 깨끗함, 소박함, 단출함이 느껴지는 것들을 산다. 그릇들을 정리한 지 꽤 되었는데 지금은 정말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남아있다. 그릇을 사고 싶을 땐, 내가 오래도록 쓸 작고 심플한 것을 산다. 지극히 내 취향의 것이어야 한다.
한 눈에 들어올 만큼 잘 정리된 그릇들을 보고 있으면 넉넉한 마음에 부자가 된 기분이다. 이런 사소한 것들, 소소한 것들이 날 행복하게 한다.
비우면 비울수록 내 마음은 이토록 채워짐을 느끼는 걸까.
비우면 비울수록 난 왜 행복감을 느끼는 걸까.
비움은 채워짐이다.
요리할 때도, 내가 만든 음식에서도, 차려냄에서도, 내 살림살이에서도 나는 비움을 통해 채운다.
이 또한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겠고 삶의 태도고 자세일진대, 지금의 나의 이런 삶의 태도와 가치관이 나는 그저 만족스럽기만 하다. 내 안의 소리에 귀 기울인 결과이자 내가 진짜 원하는 삶과도 맞닿아 있다.
꽉 채워짐보다는 조금의 부족함이, 조금의 아쉬움이 나는 익숙하고 자연스럽고 아름답다. 내 삶의 아름다움은 비움, 아쉬움, 자연스러움 이로 인한 감사함.에 있다.
간소함이 날 이토록 행복하게 하는 이유는, 간소할수록 내 마음도 간소해지고 살뜰해지기 때문이다. 간소한 삶을 살수록 사특한 마음, 미운 마음, 못생긴 마음에서 멀어진다.
다 날 위한 의식적인 선택이자 행위다.
마음이 깨끗하면, 마음이 맑으면, 순수한 마음에 익숙해지면 나.를 더욱 잘 알게 되고 나를 더욱 사랑할 수 있게 되고 내게 더욱 친절해지고 상냥해지고 존중할 수 있게 된다. 모든 것은 순환이다. 모든 것은 연결돼 있다.
모든 것은 하나다.
새 옷을 사는 대신에, 새로운 가방을 사는 대신에, 새로운 신발을 사는 대신 날 위한 신선한 식재료를 사는 데에, 평소 배워보고 싶었던 도전해보고 싶었던 무언가에, 내 취향의 그릇 하나를 이따금씩 사는 데에 쓰다보니 내 일상이 더 풍족해지는 것은 물론 내 마음도 알뜰함과 살뜰함으로 가득 채워진다.
난 결코 별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요즘 내 삶의 태도들이 주변에서는 영 낯선 모양이다. 최근 들었던 말은, 어느 날인가 내가 가방에서 조그마한 도자기 컵 하나를 꺼내 물 마시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는 것이다.
나는 종종 그렇게 도자기 컵을 가지고 다닌다. 에스프레스 컵보다 조금 큰 앙증맞은 그러나 멋스러운 도자기 컵을 깨끗하게 씻어 닦은 뒤, 모아둔 종이포장지를 재활용해 한 번 싸준다. 그러고선 밖에서 물 마실 일이 생기면 꺼내어 그곳에 담아 마신다. 내 취향대로 행동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현재 내 삶에 타인의 시선.은 없다.
취향대로 살다보니 가끔은 별나다.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취향껏 산다는 건 결코 별나거나 유별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는 내 믿음인데, 그러다보니 남의 눈이나 시선이 날 쉽게 흔들지 못한다.
고로 그러면 그럴수록 삶은 편해지고 자유로워진다. 여전히 소비하는 즐거움보다 소비하지 않는 즐거움이 더 크다.
한 시간 전 쯤 모아둔 종이백 몇 개를 재활용했는데 내 감성의 다소 두껍고 탄탄한 재질의 마마스 종이백은 양말을 담아 놓는 수납칸으로 만들었고 스타벅스에서 받은 얇은 재질의 작은 종이봉투 2개는 입구부분을 손으로 오물조물 접어가며 빈티지스럽게 만들어 각각 감자와 양파를 담아 베란다에 잘 두었다.
종이백 하나에 내 마음이 왜 이리도 살뜰해지는지. 군더더기 없는 간소한 삶이 이렇게도 내 적성이었는지 싶을 정도로 나는 꽤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누가 뭐래든 내 마음이 만족하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걸로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