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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질문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by Aarushi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어떤 브랜드인가.

나는 어떤 브랜드가 되고 싶은가.

나는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싶은가.

나는 어떤 방식으로 어떤 방법을 통해 이타적인 삶을 살고 싶은가.

네가 진짜 원하는 건 무엇인가.

진짜 원하는 걸 위해 나의 다음 스텝은, 다음 행동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필요한가...

요 며칠새 내게 집중해서 던지는 질문 가운데 하나다.


나.는 어떤 브랜드고 싶은가. 성장하고 싶은가. 곰곰히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 고민이 더 치열해야 될 것 같았다. 나에 대해 끊임없이 궁금해하고 질문하고 답하다보면 물리가 트일거라 믿는다.

단, 반드시 좋은 질문이어야 한다.


좋은 질문은 날 통찰하게 하고 관찰하게 하고 성장하게 한다.


감명깊게 읽은 책 중 하나가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다.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잔잔한 여운과 감동이 밀려왔다.

아주 잔잔한 그 무엇.이 날 감쌌다.


스토너가 죽음 직전, 그 앞에서 던진 질문. "넌 무엇을 기대했나?"

스토너를 단 한 문장으로 말하라면 단연 스토너 자신이 스스로에게 건넨 이 질문일 것이다.

두꺼운 책 장 속 거의 막바지 장에 이르러서야 나오는 이 문장이 내겐 명료했고 깨끗하게 들렸다.


그러곤 스토너 그 자신의 질문을 내게로 옮겨왔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너는 지금 네 인생에서 무엇을 기대하고 있나?"

이 문장을 알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이 문장을 얻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나는 오늘 엄청난 선물을 받은 기분이다. 이 문장 하나가 내게 오려고 도서관 서가 속 이 책이 이토록 날 불렀나보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책도 인연이다.


고흐의 영혼의 편지.속 문장들도 떠올랐다.


"네 자신을 즐겨라"

"대부분의 일은 저절로 이루어 지는 것이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성장하고 발전하게 돼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살아 있어야 한다."


나는 내 스스로에게 질문 할 수 있었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가."


이 질문에 대해 답할 수 있다면, 찾았다면, 앞으로의 내 삶은 더욱 촘촘해질 것이다. 좋은 질문에도, 지적임에도 부지런함이 필요하다.


나.라는 사람에 대한 탐구.

내 안의 우주.에 대한 탐구만큼은 게을리 하지 않고 싶은 마음이 있다.

좋은 질문과 지적 호기심은 필수다.


짜투리 시간을 활용해 도서관 서고에 파묻혀 있는 일,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차분히 생각을 정리해나가며 글 한 편 쓰는 일. 책 읽는 일. 나의 내면을 보석처럼 가꾸어 나가는 일이다.


좋은 질문은 나.를 아는 것. 나에 대한 탐구.에서 나온다.

좋은 질문 뒤 행동은 도전적이고 거침없다.

나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내 직관과 직감을 믿는 것.이 가능해진다.


좋은 질문은 나.에 대한 갈망.에서 나온다.

좋은 질문은 나.를 아는 것에서부터 나온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었다.


한 인간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를 둘러싼 사람들이 갖는 선과 악, 인간의 본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그의 작품에서 나도 모르게 흠칫 놀랄 게 여러 번이다.


개인적으로 삶과 죽음에 대한 통찰과 이해와 지혜를 책에서 얻고자 할 때 고전문학만 한 게 없다고 생각하는데 난 그렇게 또 책을 통해 그 시대 톨스토이와 만났다.


삶과 죽음은 나의 화두이기도 하다. 내가 가장 불안했던 시절로 돌아가 보면 어쩌면 그 불안이라는 게 역설적으로 삶에 대한 강렬한 의지의 반증이 아니었을까.


지금의 나는 죽음을 너무도 당연하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살고 있어서인지 지금의 내 삶과 앞으로의 삶이 두렵지 않다. 내 미래를 과도하게 예측하지도 예견하지도 앞서 가지도 않는 이유다.


그래서인지 부쩍 시간에 대해 곱씹어 보곤 한다. 일부러 의도해서 떠올리기엔 복잡하고 과학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주는 아니고, 단지 시간은 흐르는 걸까. 정도의 내 상념과 통찰을 통해 내 나름대로 가늠해보는 수준이다.


내 삶은, 내 시간은 어디로 흐르고 있을까. 잘 가고 있는 걸까.


인간이 태어나고 죽기까지의 과정으로만 본다면, 일차원적으로만 본다면 시간은 분명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까지 일직선상으로 한 방향으로 흐른다.가 어쩌면 맞을지도 모르겠다.


시간은 흐른다. 간다. 흘러간다. 떠난다. 기다려주지 않는다. 없다...

시간이라는 명사에 붙는 표현들도 이렇게 다양할진대,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것이 관념적인 측면에서의 시간의 개념이다.


삶의 경험이 켭켭이 쌓이고 겹쳐져 어느덧 삼십대 중반의 나이가 되어보니 어쩌면 시간은 내가 가는 길, 방향과도 같은 의미일 수도 있겠다. 이유인 즉슨, 나는 아주 자주. 내 길을 잘 가고 있는 걸까.라는 말을 시간은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거지. 잘 가고 있는 건가.라는 말과 바꿔 사용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시간은 어디로 흐르고 있을까 = 나는 잘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말과 같은 의미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시간에 대한, 내가 지나온 길에 대한 아쉬움과 후회가 밀려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중요한 건 그 어쩔수 없음 다음의 내 태도다. 과거와 확실히 달라진 점이 있다면 과거엔 그 후회가 나를 그리고 내 일상을 잠식하도록 내버려 뒀지만 지금은 그 후회를 나 스스로 요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과 그 뼈저린 회한과 안타까움을 내 삶의 에너지와 원동력으로 사용한다는 것. 그럼으로써 내 삶을 재정의해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내 길을 잘 가고 있는 지는 조금 더 두고 볼 참이다. 그 길이 무엇이든지 간에 조급해할 필요도 서두를 필요도 없다. 길은 얼마든지 내가 흙을 밟고 땅을 밟아 만들어가면 될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유독 내 발과 다리를 끔찍이도 아껴주었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매일매일 날 새로운 곳으로 새로운 길로 안내해주었기 때문인데 그 끔찍한 사랑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특히 파리 살 땐 단 한 번도 같은 길로 다니지 않았다. 늘 다니던 길로 가다 반드시 옆길로 새는 일, 내겐 너무 자연스런 태도였다.


매일 새로운 골목길을 마주하는 일, 어느 것 하나 똑같지 않은 건물들과 색다른 시선을 내 눈에 담으며 유유히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 언제나 내 종착지는 우리집이었던 것처럼, 그렇게 한참을 돌아가기고 샛길로 빠져도 결국 하나의 길을 만나게 된다는 것. 연결된다는 것. 이 조차도 일상에서 느낀 경험이고 지혜였고 진리였다.


어쩌면 서른 후반의 딱 이시점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할만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졌다. 사람은 절대 안 변한다고 하는데, 철저히 주관적으로 개인적으로는 삼십대 초반의 나와 서른 후반이 된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이 들어가면서 때문만은 아니며 철저히 경험에서 나온 그 무언가.다.


"그땐 또 다 그럴 이유가 있었겠지. 지금 이렇게 완전히 다른 나.를 만나게 하려고 그랬나봐. 내가 가진 그 모든 경험이 소중하고 이 경험이 날 세상에서 하나뿐인 값진 아이로 만들어 주고 있어."


내 시선이 달라지면서 세상의 낮과 밤이 이토록 아름다워 보인적이 있던가.하곤 밤의 냄새와 공기를 힘껏 들이 마신다.


시간은 어디에.

나는 어디에.

나는 나의 길을 잘 가고 있는 걸까.

날 둘러싼 것에 대해 의심하고 또 의심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습관을 가지게 됐다.


이 작업은 날 귀찮게 하는 것이 아니고 내 일상에서 너무도 자연스러운 생각과 의식의 흐름 속 진행된다.


내 나름대로 조심스레 중간평가를 하자면 내 시간은 상냥하고 깜찍하고 유쾌한 방향으로 샛길로도 빠졌다가 옆길로도 샜다가 뒷골목으로도 빠졌다가 하기를 반복하며 애쓰고 있다는 생각이다.


유쾌하고 그렇다고 가볍지 않으면서도 우아하고 품위 있게 살고 싶은 내 소망은 오늘도 이렇게,


내 길은 잘 가고 있는지.

내 시간은 어디로 흐르고 있는지.

깜빡하지 않도록 살피고 갔다.


주인공 이반의 죽음을 마주하다 또 다시 삶을 통찰할 기회를 얻었다. 톨스토이 할아버지와의 만남은 늘 그렇듯 내 생각을 쉬도록 가만히 놔두질 않는다.


깨어있게 하고 끊임없이 생각하게 해주는 것.

내가 고전문학가들과 고전 철학자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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