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꽂히면 질릴 때까지 먹는 성미가 있다.
어릴 적부터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감자. 감자채 볶음.이었고 지금도 감자가 들어간 음식이라면 뭐든 가리지 않는다. 외국 살 때도 장 볼 때 감자를 사지 않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유럽의 감자가 한국보다는 싸서 가성비도 참 좋았고 솔직히 말하면 내 입맛엔 유럽 감자가 훨씬 맛있다.
감자의 맛.이란 아주 푹 익었을 때 그 포슬포슬하면서도 푹 뭉개지는 게 제 맛이라고 설명하면 될까. 감자채 볶음, 슈가를 넣고 삶은 찐 감자, 감자가 들어간 야채 볶음밥, 된장찌개 감자, 닭볶음탕 감자, 감자 솥밥, 매쉬포테이토 등 주요리보다도 보통은 곁들어가는 감자만 골라 먹었을 정도로 감자는 내게 사랑이다.
감자는 추억이기도 한데, 내가 어릴 적 엄마는 채 말고도 적당한 크기의 깍두기 모양으로 썬 감자에 간장을 넣고 볶은 요리를 자주 해주셨다. 꼭 깨를 골고루 뿌리신 후에야 식탁에 내어 주셨다. 감자, 햄, 당근 ,양파를 넣고 후추, 맛소금으로만 밑간 한 맑은 볶음밥은 엄마의 시그니처였다. 간단한 재료로 만든 것인데 언제나 똑같이 환상적인 맛이었다. 감자 얘기하다 문득 그 시절 엄마의 감자요리와 우리집 식탁 풍경이 오버랩되는 이 잔상...
역시 음식과 맛과 추억은 하나인가 보다.
간식으로 종종 내어주셨던 친할머니의 찐감자도 찐하게 밀려온다. 꼭 감자 세개를 삶아 그 옛날 스댕(스테인리스)그릇에 담아내어주셨는데 할머니의 비법은 슈가당이었다. 아주 살짝 알맞게 타 들러붙은 감자 밑동을 난 그리도 좋아했는데 그때의 찐 감자는 공부하고 있는 손녀에게 보내는 이거 먹고 파이팅.이라는 암묵적인 응원의 메시지와 사랑표현이셨을 것이다.
파리 살 던 때 샤틀레 역 근처에 있는 큰 모노프리 아니면 텅플 역 근처에 있는 모노프리에서 주로 장을 봤다. 감자 모양이 너무 제각각이라 처음엔 이게 감자인건가.싶었다. 어떤 것은 생강 모양의 것도 있었으니 말이다. 우리나라 마트에서 파는 것과 모양, 맛 말고도 또 다른게 있다면 우리나라 감자는 보통 흙이 잔뜩 묻어 있기 마련인데, 유럽의 감자는 깨끗하게 세척이 돼서 내놓는게 조금 달랐다.
문득 감자를 집어 들다,
감자, 너 조차도 같은 게 하나도 없구나.였는데,
모양은 조금 작아도 맛은 참 좋았다. 감자 모양도 이렇게 제각각 일진대, 우리네 삶도 다 제각각인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날이 추워지면 따뜻한 국물 보다도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게 이 감자다. 감자를 단독으로 먹는 것보다도 흰쌀밥과 함께 먹어야 제 맛.이라는 생각인데 탄수화물에 탄수화물이라... 하. 그래서인지 지금의 뱃살은 더블 탄수화물에 나잇살까지 더해 엎친 데 덮친 격으로다가 총체적 난국이 되었나 보다.
좋아하는 감자를 고르다 먹다 생각하다, 또 이렇게 추억이 밀려오고 그러다 내 뱃살 걱정까지 하게 되는 이 생각의 무작위함이란...
앞뒤 없는 내 생각처럼,
어느 것 하나 같은 모양이 없는 감자처럼,
그러나 결국엔 한 가지의 생각과 철학으로 귀결되는 나의 이 생각의 흐름 조차 이제 정겹다.
때로는 생각의 흐름을 마음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두는 일 또한 내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가는 세월 막지 못하듯 때로는 이리저리 흘러가는 내 생각을 막지 못할 때도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아가고 있는 나, 그리고 나이가 된 듯하다.
결국 그러다 다시 집 나간 내 정신과 생각을 달래서 데리고 오면 될 일이다.
무조건 푹 익어야만 먹는 감자 취향을 가진 나는,
내가 애정하는 감자처럼 나라는 사람도 그렇게 푹 익어갔으면 한다.
푹 익은 감자를 먹고 있노라면 입 안에서 뭐랄까.
한마디로 먹고 사는 맛이 난다.고 느낀다.
서로 사랑하면 연인도, 부부도 닮는다는데,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닮았다 혹은 닮아간다고 믿는 편이다.
그런 의미라면 어쩌면 난 푹 익은 감자와 아주 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나도 제 각각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지만 아주 환상적인 맛을 내는 푹 익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내 스스로에 대한 나의 호감도를 높아지게 한다.
감자를 생각하다 여기까지 온 내 사유와 함께 늘 그렇듯 내 하루도 저물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