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전 헤르만 헤세의 <킬링조어의 마지막 여름>을 읽어내려갔다. 책을 읽을 땐 어느 순간 확실하게 몰입된다. 오전에 책 한 권을 읽겠다.는 즉흥적인 계획을 순식간에 해냈다. 책 두께가 얇기도 했지만 한 시간-한 시간 이십분 남짓 몰입했고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땐, 마치 뿅하고 현실세계로 다시 돌아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헤르만 헤세의 <킬링조어의 마지막 여름>을 읽을 날이었던 것이다. 오늘의 인연이었던 것이다. 헤르만 헤세의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건, 동양사상이 잘 묻어난다는 것. 그의 동양사상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 애정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어 흥미롭다. 주인공 클링조어의 모습에서 반 고흐가 보였고 나아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의 알렉시스 조르바가 떠올랐다.
오늘 오전, 후루룩 냉면 말아올려 먹듯 읽어 내려간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통해 나 자신에게 또 다른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진짜 내가 원하는 걸 차분하게 침착하게 찾아 보려고 노력하는 요즘,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위대한 무언가가 되지 않아도 된다, 실은 위대해지고 싶다는 생각은 없는데, 사는 동안 건강하게 마음의 큰 동요없이 침착하게 잘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잘 먹고 잘 배변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오늘 이 책을 만난 건 필연이었겠다.
헤르만 헤세가 몬타뇰라의 카사 카무치.로 이사하던 당시의 심경을 고백한 글을 읽고는 몸에 전율이 일었다. "나는 몰락한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번 기운을 끌어모은 것이다. 나는 여전히 작업하고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지 않았다. ㅡ내 정신이 말살되지는 않았다."
글과 말은 하나다. 고전을 읽어 내려갈 때면 그 시절 작가가 내 눈 앞에서 나와 함께 대화하는 것 같고 내게 갖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다. 고전은 말이 많은 것 같으면서도 말이 없고 이토록 분명하다.
확실히 성향은 보헤미안 감성이랄까. 포카혼타스, 인디언 부족의 색감과 결을 좋아한달까. 매일 들고 다니는 큰 천가방이 있는데, 내 세대 어릴 적 포대기 재질이라는 게 딱 알맞다. 실은 포대기 일부분을 잘라 박음질 한 것과 다름없다. 서촌에서 구매한 건데, 만족스럽게 잘 사용하고 있다. 오늘은 그 가방을 뒤집었다. 겉과 속이 다른 무늬여서 양면으로도 사용가능한데, 오늘은 흰색과 연두가 혼합된 줄무늬가 있는 쪽을 바깥으로 뒤집어 나왔다. 별 거 아닌 것 같아도 꽤 새로운 기분이 든다. 새 가방을 드는 것 같달까.
분명한 사실 앞에 나는 늘 서있다. 지금 이 순간 밖에 없다는 걸. 무엇이든 내일로 미루지 말자는 것. 내일이 있으리라고 철썩같이 믿는 것처럼 허무맹랑한 것도 없지 않나?싶다. 내일은 분명 다를거야.라는 기대보단 오늘 하루를 충실하게 착실하게 살아내는 것이 내게 더 유익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도 그리 오래 되진 않았다. 실은 알고 있었지만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집착과 불안, 두려움이 날 휘감고 있는 한 요원한 것이었다.
간만에 찾아온 이 쉼.을 나는 어떻게 보내고 있는가? 또 다시 부들부들 조급해하며 불안해하고 있지 않은가? 남과 비교하고 있지 않은가? 나 자신을 초라하다 느끼고 있지 않은가?
확실한 것은 이것이었다. 내게 일어난 건, 상황이 변한 것이지 나.가 나 자신이 변한게 아니란 걸, 나의 가치가 변한 게 아니란 걸. 내가 가진 것이 진짜 내가 아니라는 걸. 날 힘들게 하는 건 내 감정이 나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라는 걸. 이미 벌어진 상황을 되돌릴 수 없지 않은가. 그 상황을 내게 유리한 방식으로, 유리한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이 전부라는 것.
오늘 아침 불현듯 인 것이다. "내게 찾아온 쉼을 즐기지 못하는 것도 어리석음이다." 지난 어리석음으로 허송세월한 시절도 경험하지 않았나? 더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은 내 의지는 단호했다. 어차피 이런 상황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하다. 기꺼이 받아들이면 편해진다. 대응하기 수월해진다.
삶이란 얼마나 단순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