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사소한 휴가

by Aarushi

꺄악.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거실에 덩그러니 앉아있다. 오늘은 장보러 집 앞 로컬푸드 직매장에 다녀온 게 전부. 바싹바싹한 바깥 공기를 있는 힘껏 들여마셨다. 습하지 않아서 그리 무덥게 느껴지진 않는다. 써큘레이터 돌아가는 소리, 매미소리,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사라지는 햇볕이 드리운 그림자에, 메모장과 핑크색 볼펜에, 필통에, 민트색 무선 마우스와 노트북... 모두들 제자리에 숨죽이고 잠을 자는 듯이 평온해 보인다.


며칠 전 친한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초아야 잘 살고 있어? 왜 이렇게 연락이 없니. 휴가는 정해졌어? 언제야? 언니가 맛있는 데 알아놨어. 맛있는 거 사줄게. 휴가 때 놀러와." 실은 이번 휴가때 친하지만 자주 보지 못한 언니들과 친구들을 좀 만날까.했지만 이내 그 마음을 접었더랬다.


이유는 혼자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였다. 평일의 휴가가 주는 그 특유의 특별함이 있지 않나. 그 평일의 휴가를 온전하게 평온하게 고요하게 때론 침묵할 만큼 무심하게 보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아직 내 스스로에게 던질 질문과 소리가 많이 남아서이기도 했고.


눈깜짝할 새 지나갈 걸 알고 있어서인지. 혼자 보내는 휴가도 이토록 사소하고 평범할 수가 없다. 사실 휴가는 늘 있다. 나는 하루에도 한 두 번은 꼭 나만의 시간을 갖는데, 공원 벤치에 앉아 눈을 감고 십분에서 이십여분 명상에 잠기거나, 책을 읽거나, 걷는다.


이렇게 햇볕이 쨍쨍하고 짱짱한 날은, 빨래를 해야한다. 손빨래 할 것은 주물럭주물럭 해서 바로 널고 탈수된 옷들도 탈탈 털어 베란다에 넌다. 이런게 사람사는 맛이 아닐까 싶다. 점심 먹은 뒤 설거지도 그 자리에서 뚝딱 해놓고 마른 거즈로 식기류를 닦아 잘 정리했다. 테이블 위도 정리하고 버릴 건 또 없는지. 무심하게 주위를 둘러본다. 저녁 6시가 되기 전에 도서관에 들러 책을 빌려와야지.싶고.


아직 여러 질문들이 남았다. 그러기 위해선 혼자만의 시간이, 고독이 필요하다. 네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깊이 물어보지 않으면, 정확하게 명확하게 물어보지 않으면 안된다. 집착과는 다른 것이, 이런 류의 자기 탐구와 질문은 때론 고통스럽지만 결국 내 안의 빛을 발견할 수 있게 해준다.


삶이 단순해지려면 원하는 게 명확해야 한다. 분명해야 한다. 삶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도, 중심을 잡지 못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나를 잘 몰라서.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지 않아서. 그냥 살아서.


방황하고 우울했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정확히 들어맞는다. 당시 나는 내 스스로에게 제대로 된 질문을 던져 본 적 있는가? 나는 질문하는 사람이었나? 나 자신을 들여다보려고 했는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 본 적 있었나?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아파하고 두려워하고 고통스러워만 했을 뿐 내가 진짜 원하는 걸 찾으려는 노력은 부재했던 것이다.


지금의 나는 질문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전의 내가 보면 소스라치게 놀랄만큼 사색은 일상이 됐고 내면에 집중하게 되면서 진짜 질문을 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게 되었다. 질문하지 않는 삶은 내겐 죽은 삶과 같다. 실천하지 않는 지혜와 앎은 내겐 허무맹랑한 것이다. 류시화 시인의 잠언집 제목처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싶지만, 아쉬워할 게 아니라 그걸 딛고 일어서, 그걸 넘어 새로운 다리로 건너가는 일이 내겐 더 의미있는 일인 것이다.


머무를 것인가? 도약할 것인가? 내게 달렸다. 이젠 정말이지 실행해야 한다. 생각만 하지 말고 사색만 하지 말고 사유만 하지 말고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내가 깨닫게 된 것들을 내 삶에 하나씩 적용해 봐야 한다. 흥미롭다. 이렇게 생각하니 자꾸만 이 삶이, 인생이, 세상이 꼭 놀이터같고 실험실 같다.


"초아야, 이제 곧 마흔인데, 살아보니 지난 내 걱정들은 정말이지 모두 실체없는 것들이었어. 다 이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했던 거야. 네가 했던 걱정들 실제로 일어난게 있었니? 내 생각이 변해야 삶이 변해. 그렇담. 여태까지 내가 살아왔던 방식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시도를 해보는 건 어때? 일상의 아주 작고 사소한 것에서부터 생활습관에서부터 전부 긍정적이고 유리한 방식으로 거꾸로 한 번 해보는 건 어떨까? 아주 재밌을 거 같지 않아? 어떤 일이 펼쳐질지 궁금하지 않아?"


도서관에 들러 책도 몇 권 빌려올 텐데 오늘은 또 어떤 책이 날 부를까. 나와 인연이 될까. 독서와 글쓰기는 내겐 수양이다. 순전히 내 마음이 시켜서 하는 일이다. 독서와 글쓰기 할 때를 생각해보면 무심이다. 어떤 두려움이나 불안이나 고통이나 사특한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알아차림에 대한 알아차림이 보다 선명해지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다.


휴가라고 별 건가. 내겐 생일도 마찬가진데, 언제부터인가. 휴가, 생일, 명절, 크리스마스, 이런 것들에 이토록 무심해졌다. 생일이라고 별건가. 명절이라고 별건가. 크리스마스라고 별건가. 이런 날들도 내겐 그저 어느 요일과 다름 없는 하루고 일상이고 삶 그 자체다.


오늘은 이 날이니까, 무언가 스페셜하게 대하기 보단, 모든 날이 모든 순간순간이 내 생일이고 휴가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매일이 내 생일이라고 생각하면 순간순간이 얼마나 스페셜해질까. 무엇이든 다 생각하기 나름인데, 그 작은 차이가 삶에 태도와 방식에 큰 차이를 가져오기도 한다.


이토록 사소한 휴가가 내겐 이토록 유익하고 평안할 수 있는 건, 평소에도 하루에 꼭 한 번은 나만의 시간을 갖는 습관이 있기 때문이다. 그 짧은 시간이 내겐 쉼이고 휴식이고 휴가고 명상이고 알아차림의 시간이다. 그러니 아무리 며칠 간의 휴가라 한들 이토록 무심할 수밖에. 여느 날처럼 내가 날 존중하고 대접해주면 된다. 좋아하는 커피 한 잔을 사주기도 하고 좋아하는 음식을 사주거나 직접 요리해 먹거나, 눈여겨본 잔잔한 영화 한 편을 보거나, 글쓰기를 통해 사색과 사유를 정리하고 그 과정을 통해 내 의식과 기운의 건강과 밸런스까지도 체크해본다.


스무살의 초아가 모든 일에 이토록 무심하게 된 서른 후반의 초아를 보게 된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거꾸로 마흔을 앞둔 서른 후반의 초아가 스무살의 초아를 만나면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을까?


삶이 이런 거였던가.싶을 만큼 내 삶에 지혜롭지 못했던 내 스스로에게 살갑지 못했던 지난 내가 안타까울 때가 있다. 그런 안타까움과 아쉬움도 이젠 용서로 수용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러니 이 얼마나 다행인지. 그저 감사할 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지금에, 순간순간에 감사하는 일 뿐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모든 것은 지금의 내가 되기 위한 과정이었다면 믿어질까. 그 어떤 것도 잘못된 것은 없었다. 자기 생을 그 누가 판단할 수 있을까. 자기 자신이라고 자기 생을 마음대로 판단할 수 없다. 그래서 내 인생을 판단하려 들지 않는다. 어느 순간 내 인생을 판단하는 걸 그만뒀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니 내맡기니 그때부터 세상살이가 조금은 수월해졌다.


이토록 사소한 휴가.라는 제목이 불현듯 떠올라 곧장 키보드에 손을 댔다. 그 와중에 스크러빙 마스크팩을 양 볼에 고루 펴발라 두었다. 화장하지 않지만, 까무잡잡한 피부라 여름이면 태닝했냐는 이야기를 자주 듣지만, 낯빛과 피부결만은 건강하게 유지하려고 한다. 모발에 머드팩도 종종 하는데, 피부와 머릿결만큼은 나이 들어가며 잘 가꾸고 싶은 바람이다.


휴가여도 도통 휴가같지 않은 이토록 사소한 휴가. 그럼에도 내 마음은 이토록 풍요로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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