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잠이다. 며칠째 새벽이 되어서야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평소 잠을 정말 잘 자는 편인데도 이렇게 꼭 한 번씩 위기(어떤 상황이 벌어짐으로 인한 스트레스, 우울감)가 잠을 잘 자지 못해 컨디션이 최악이 되곤 한다.
이럴 때 잠을 자지 못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생각이 날 잠식해서. 생각이 너무 많아서.다. 생각을 내려놓아야 하는데 알면서도 훅 침잠하게 된다. 평소 촉이나 감이 좋은편인데, 역시나 지난주부터 예상했던 일이 일어났다. 내 삶에 결코 치명적인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결코 내게 그 어떤 영향도 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막상 일이 벌어지면 그 순간은 어쩔 수가 없다.
단, 딱 하루다. 내가 훅 가라앉거나 잠시 침잠하게 되는 때는. 어제 늦은밤 버스를 타기 전,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냉큼 들렀다 가라는 언니와 통화한 뒤 집에가는 버스에 올랐다. 버스에 탄 시간을 보니 저녁 10시 30분. 이 시간에 버스를 탈 일이 없는데, 어찌어찌 마무리하다 보니 그 시간이 됐다.
이십여분 버스를 타고 가다 내려 횡단보도를 건너 아파트 단지로 들어서니 어느새 내 마음도 참 많이 안정돼있었다. 사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 게다가 어쩌면 정말 별 거 아닐 수 있다. 단지 내가 생각했던 것들이 나름 계획들이 아예 흐트러진 것일 뿐이었다. 이 또한 집착이었겠다.
축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 전화를 받은 언니와 형부가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마음인지. 언니와 형부가 이런 경우라면 어땠겠는지. 어땠었는지. 삶에 대해, 인생에 대해, 돈에 대해 그렇게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했다. 덕분에 위로 됐고 새살 돋듯 마음이 다시 차 올랐다.
시간을 보니 어느 새 새벽 1시가 됐다. 집까지 걸어서 10분이면 가는데, 너무 늦었기도 하고 언니네서 자고 가기로 했다. 며칠 째 잠을 설쳤는데ㅡ 바로 잠들 것 같았고 다시 수면 패턴이 돌아올 것 같았다. 그렇게 어떻게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푹 잠에 들었고 아침 일찍 개운하게 일어나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만에 본래 수면패턴을 다시 찾았다는 생각에 기뻤고 무엇보다 내 몸과 마음이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알아차릴 수 있었다. 미리 삶아 소금물에 담가둔 삶은 계란을 3개를 접시에 담았다. 날 위한 아침을 차리면서, "그래, 초아야 까짓 거 이게 뭐 별 일이니. 오히려 기회일지도 몰라. 진짜 네가 원하는 걸 하라는. 진짜 네가 원하는 걸 찾을 수 있는. 그러니 불안할 게 뭐가 있니. 삶이 두려울 게 뭐가 있니. 멀쩡한 몸과 마음이 있는데, 뭔들 못하겠니?" 어느 새 날 토닥토닥 다독이고 있었다.
그러면서 느낀 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내 하루는, 내 아침은 잘도 돌아간다.는 거였다. 나만 빼고 모든 것은 온전하게 원래대로 아무 일 없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잘만 돌아가고 있다. 써큘레이터도 잘만 돌아가고 있다.
어제 언니와 형부와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단 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집착하고 있다는 걸. 돈에 집착하고 있다는 걸. 오히려 돈에 대한 집착을 하고 있다는 걸 인정하고 저항하지 말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 집착이 날 불안하게 하고 두려워하고 괴롭히는 것이었다. 내 안에서 극렬한 저항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주 상쾌한 기분이다. 정신이 아주 맑아졌다. 명료하고 선명하다. 시야도 더욱 선명해졌다. 모든 것이 환하다. 잠을 아주 잘 자서다. 기운이 안좋고 일이 잘 안풀릴수록 잘 먹고 잘 자야 한다. 본질이다. 잠을 아주 잘 자고 났더니 에너지가 차오른다. 무엇이든 못하리. 역시 잠이다.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위기가 닥쳐도 낯빛과 눈빛도 잃지 말아야 한다. 얼굴에 스크러빙 팩도 펴 발라놓았고 머리에 볼륨도 힘껏 살렸다. 류시화 시인의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책이 읽고 싶어졌다. 날 부르니 버스 타기 전 집 앞 도서관에 들러 책도 빌릴 참이다. 책을 읽고 나면 내 마음은 더욱 안정될 것임을 안다.
처음 겪어본 것도 아닌데, 가끔 이런다. 아무렴 어떤가. 이것도 나인 것을. 어떻게 완벽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완전할 수 있겠는가. 나는 성장하는 중이고 앞으로도 계속 성장하는 사람일 것인데.
위기가 닥쳤을 때, 하루 정도는 그럴 수 있다. 아니, 그래도 된다. 단, 그 침잠의 시간이 길지 않게, 위기가 아닌 또 다른 기회로 전환될 수 있게 우뚝 서는 굳은 심지와 나에 대한 믿음을 회복해야 한다.
어쩐 일인지. 하루 지난 지금, 내 마음은 고요하다. 차분하다. 진정됐다. 마음이 고요하니, 차분하게 내 안을 들여다보게 된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진짜 네가 원하는 걸 이젠 해야되지 않겠니? 더는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 그렇담 바로 하자.! 살아보니 불과 1년 전만해도 그때 했던 네 걱정과 불안과 염려와 두려움이 실제로 일어난 게 있었나? 1년 전과 지금의 나, 결국 뭐 달라진 게 있었나? 나는 성장했나?
나는 서른 중반의 나로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 시절을 아쉬워해서, 후회해서가 아니라 그 시절의 감정과 기분이 무척이나 견디기 힘들었기에 나 자신을 위해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는 것과 그걸 딛고 일어난 경험이 있다는 것에 대한 굳음 심지와 의지다. 뒤돌아보지 않는 삶, 과거에 머물지 않는 삶, 미래에 머물지 않는 삶, 현재에 머무는 삶,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나.가 내겐 의미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프랑스 샹티이 고성과 콩테 박물관이 나왔다. 우연인지. 아직도 기억이 선명한데, 파리 살던 때 주말 기차를 타고 무작정, 즉흥적으로 찾았던 곳이 샹티이 고성이었다. 1월 겨울 찬바람을 맞으며 허허벌판이던 경마장을 지나 구글맵 하나에 의지해 걷고 또 걸어 찾았던 곳이었다. 이곳엔 오직 나뿐인건가. 추운 겨울이어 그런가. 날씨 때문인가. 사람을 거의 찾아 볼 수 없었다.
마치 중세에 머물고 있는 듯한 기분에 넷플렉스에 나오는 고전영화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걷고 또 걸으니 아름다운 샹티이 고성이 눈에 들어왔다. 우중충한 날씨탓에 스산한 감은 있었지만 구름과 안개가 뒤섞여 샹티이 고성을 더욱 빛내고 있었다. 방황하는 마음을 어찌할 줄 몰라 찾은 샹티이 고성, 그리고 그 길, 이따금씩 일부러 소환해 그 시절의 나를 보곤 한다.
이 아침 우연히 보게 된 것도 다 이유가 있겠지. 그 시절의 나를 소환해 기운내라는 거겠지. 이럴때면 더욱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 모든 것은 다 연결돼 있다. 어느 것도 우연은 없다.
이럴 시간이 없다. 어제 언니와 형부가 내게 건넨 메시지는 분명했다. "초아야, 네 안을 잘 들여다봐. 너에게 차분하게 질문해봐. 네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어떤 두려움인지. 네가 원하는 건, 하고 싶은게 분명이 있는데 망설이고 있다면 왜 일까? 네가 원하는 걸 하려면, 나이는 점점 들고 시간과 비용도 필요한 일일텐데 그걸 마주할 용기가, 그걸 도전할 용기가 부족해서, 없어서일지도 몰라. 까짓 거 뭐 어때? 뭐든 다 네 안에 있어. 네 마음 먹기 달린거야.!"
감쪽같다. 어젯밤 침잠했던 내 마음이 내 기운이 한 밤 지나고 나니, 푹 잘 자고 나니, 마치 "무슨 일 있었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아무일 없었다는 듯. 어쩌면 어떤 일이 일어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정말 별 거 아닌 일일지도 모른다. 그저 내게 일어난 일련의 한 사건, 상황일 뿐이다.
상황에 대처하는 유일한 방법은, 이와 같은 나의 대응방식과 태도다. 위기를 위기가 아니게 만들어버리는 힘. 위기를 더 나은 기회로 만드는 마음 근력을 쌓는 것이다. 알아차렸으니 되었다.
꺄악 펴바른 팩을 씻어내야겠다. 피부도 뽀송뽀송해졌을 테고 이럴 때일수록 내가 날 더욱 사랑해야지. 존중해야지. 친절해야지. 으랏차차. 힘차게 자리에서 일어나 여느 날과 다름없이 무심하게 차분하게 침착하게 그렇게 오늘 하루도 살아내야지.
늘 그랬듯, 위기는 날 더욱 강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