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잠이 깼다. 아무리 일러도 새벽 5시 반 쯤인데, 배가 너무 고팠을까. 어젯밤 서브웨이 샌드위치 하나를 사놓았는데 곧장 손이 갔다. 입을 야물게 모아가며 오물오물 씹었다. 내 시선은 한 곳에 집중됐고 먹고 있는 것.에만 집중했다. 알아차림의 과정이고 이 또한 명상이다.
나는 온전한가. 온전한 사람인가. 불현듯 이 질문이 나왔다. 내 안에서 강한 울림이었다. 많고 많은 것 중에 지금 이 순간 왜 불현듯 온전하다.였을까. 묻고 따질 것 없이 내 안에서 이는 소리엔 이유가 없다. 크고 작은 스트레스를 마주하게 되면 유독 이 질문이 인다.
나의 말, 나의 언어, 나의 목소리, 나의 톤, 나의 눈빛, 나의 말투, 과연 온전한가? 안녕한가? 친절한가? 상냥한가? 시시로 알아차리게 된다. 어떨 땐 왜 이러는 걸까요? 혹은 초아야 차분하게, 침착하자. 이런 방식으로 내 안의 나에게 말을 건다.
배가 차고 나니, 아직 동트기 전이겠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내가 하고 싶은 일이란 이럴땐 글쓰기다. 새벽 글쓰기는 낭만있다. 모두가 잠들고 있는 이 시간, 깨어있는 사람이라곤 나뿐일거야 혹은 마치 이 우주에 나만 덩그러니 홀로 존재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데, 그저 그런 감상과 시점들이 이토록 낭만적인 것이다.
인정해야만 했다. 아니 인정하게 됐다. 나란 사람, 생각이 너무도 많은 사람이란 걸. 생각은 내가 아니니, 생각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내가 일으키는 것이 아닌 걸 알면서도, 알아차릴 수 있으면서도 온갖 잡생각이 날 사로잡을 때면, 정말이지 환장할 노릇이다. 몸부림 치면 칠수록 더욱 거세진다. 그러니 저항하는게 무슨 소용인가에서 차라리 인정하자.가 됐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나만 유독 그런걸까. 다른 사람들도 이토록 생각이 많을까.
감도 촉도 잘 맞는 편이고 눈치도 빠른 편이라 한편으론 이런점이 어떤 상황에 대해 미리 불안해하거나 지레 짐작하는 것이 내게 불리하게 작용한 부분이 있지 않았을까싶다.
어떨 땐 내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멍할 때가 있다. 그러다 무언가 페이드 아웃되면서 본래의 것이 드러나는 듯한, 알아차림의 순간으로 전환된다.
곧 마흔인데ㅡ 나는 무엇을 주저하고 있나?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나?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텐가?하는 내 안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중이다. 내가 경험하고 느끼고 깨닫게 된 것들을, 삶의 지혜와 통찰을 내 삶에 직접적인 방식으로 적용하지 않으면, 실천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일까?
여전히 헤맨다. 여전히 허덕인다. 잘 가는듯 하면서도 생은 절대 쉬이 가게 두지 않는다. 어떨 땐 멈춰!하듯 어떨 땐 그렇게는 안되지?하는 것 같기도 어떻게서든 날 흔들어댄다. 이제는 안다. 그 흔들어댐이, 그 끝은 결국 날 성장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걸, 필연이란 걸.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건 실천이다. 행동이다.
하루란 우리의 수많은 선택들로, 그 결과들로 이뤄지지 않나. 아침에 무엇을 먼저 할지. 아침으로 무엇을 먹을지. 어떤 귀걸이를 찰지. 어떤 헤어스타일을 할지. 어떤 옷을 입을지. 어떤 신발을 신을지. 오늘은 어느 길로 걸어볼지. 오늘은 어떤 일들로 하루를 채워나갈지...
서른 후반, 내 안의 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깊고 강력하다. "언제까지 이러고 살텐가?" 알을 깨고 나가고 싶다. 낡고 오래된 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식의 전환으로 정말이지 나답게, 단단하게, 무심하게, 사소하게 그러나 찬란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있다.
알을 깨고 나가고 싶다.에서의 알이란 오랜 습과 무의식에 각인된 기억과 습관, 생각으로부터의 탈피이자 새로운 관점과 인식의 대전환으로의 이동이다.
알을 깰 수 있겠는가? 알을 깰 용기가 있는가? 나의 대답은 예스!다. "초아야, 계속 이렇게 살텐가? 아니! 이렇게 두지 않을테야! 한 번 시험해볼테야! 이 세상이 실험의 장이라고 생각해 볼테야. 재미난, 설렘으로 가득찬 체험의 장, 실험의 장, 놀이라고 그렇게 한 번 살아나가 볼거야. 체험해 볼거야. 마치 영화관 스크린 위에 상영되는 영화처럼, 그렇게 살아볼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