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olievibes Aug 26. 2024

어린이는 시인이다

여름이 드디어 그 자리를 가을에게 내어주려고 시동을 걸었다. 부릉부릉. 확실히 달라졌다. 아침, 저녁 공기가 시원해졌다. 저녁 먹고 2시간을 내리 걷고 또 걸었다. 지치지 않았다. 핸드폰 밧데리가 2%로로 남지만 않았어도 오늘은 분명 3만보를 찍었을 거다. 성시경의 방랑자.를 재생했다. 반짝이는 조명 아래, 가로수 아래를 지나며 마치 영화 속 주인공이 된 듯. 그런 마음으로 걸어졌다.


5살 조카 유겸이에게 물었다. 무슨 이야기 끝에, "나 애기 아니야...^^" 이러길래, "울 유겸이 애기 아니야? 이제 어린이지? 이모가 궁금해서 그러는데, 애기가 아닌 건 어떤 거야? 애기가 아닌 이유 3가지는?" 어린이집 가방을 한 쪽 어깨에 맨채 밤톨같은 유겸이 손을 잡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나는 옆에서 하나, 둘, 셋... 이런 방식으로 추임새를 넣었다.

유겸이 왈,

"1. 기어 다니지 않는다. 2. 쪽쪽이를 물지 않는다. 3. 엄마가 먹여주지 않는다." ㅎㅎㅎ 어맛. 나는 듣자마자 소스라치게 그러나 깔깔깔 웃고 말았는데. 아니, 정말 맞지 않은가. 조카의 순수에 나는 완전히 빠져 버렸다.


"모든 아이들은 시인이다."라고 한 헤르만 헤세가 옳았다.


지난 주말 언니네와 저녁 식사를 하고 난 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둘째 조카가 물었다. "이모는 천재야? 바보야?ㅎㅎㅎ" 나는, "천재도 아니고 바보도 아닌 듯...^^" 그랬더니 유겸이 왈, "천재도 아니고 바보도 아니면 바보 아니야?"ㅎㅎㅎ 정말이지 아이들의 판단 없는,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순수란, 이런 것이다. 군더더기 없다. 한 번 맛보면 환장할 노릇이다.


어린이와의 대화는 미소짓게 한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다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내 삶을 바라볼 수 있다면, 사람을 바라볼 수 있다면, 조금은 더 따뜻한 세상이 될텐데. 그러지 않을까?


오전 오후, 예상치 못하게 일이 꼬이고 말았다. 왔다갔다하며 쏟은 시간과 에너지에 오후 3시쯤 되어서야 집으로 가는 버스에 탔고 이미 몸이 축... 녹초가 돼 있었다. 이런 마음을 조카 유겸이의 대화에서 휘리릭 날려버렸다. 털어버렸다.


집에 돌아온 뒤, 한참을 멍하니 소파 위에 앉았다. 학창시절 들었던 김형중의 그랬나봐.를 듣다 정신을 번뜩여 자리를 일어났다. 도입부 멜로디만 들어도 그 시절 추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분명 학창시절, 대학시절을 경험했는데, 마치 그 시절 모두가, 지나온 세월 모두가 정말이지 꿈같다. 잡히지 않는 구름처럼, 일장춘몽같다.


서른이 지나 열병처럼 호되게 앓은 우울감과 무기력감, 불안, 두려움의 감정은 날 파괴했다. 감정이 날 파괴할 수 있어도, 삶은 날 파괴할 수 있어도, 파괴되지 않을 권리는 내게 있었다. 그땐 도무지 몰랐다. 알 수 없었다. 그 누가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꽤 오랜 시간 허우적대며 수많은 길을 돌고 돌아서야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여전히 방황한다.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방황의 시간이 아주 짧다는 것. 부메랑처럼 결국 제자리를 잘 찾아 온다는 것이다. 아마 죽을 때까지 이 방황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완전한 건 없으니까. 완벽한 것은 없으니까. 모든 것은 변하니까.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 있는 그대로 바라봐야 한다. 인정해야 한다. 수용해야 한다. 용서해야 한다. 사랑해야 한다. 친절해야 한다. 존중해야 한다. 상냥해야 한다.


잠시 찾아온 우울감은 정녕 실체가 없는 것이었다. 생각이 만들어낸 것 뿐. 곧잘 알면서도 정말이지 나도 모르겠다. 나는 모른다.가 적확한 표현일 것이다.


죽음을 매 순간 인식하면서도 우울감에 흠뻑 젖는 모양새일 때면, 마치 그 모습이란 프렌치 토스트를 만드는 과정과 흡사한데, 두꺼운 브리오슈를 계란물에 풍덩 빠뜨려 흠뻑 젖게 하는 모양새다. 내 마음이 그렇게 늘어졌다면 축 쳐져 흐물흐물거릴 때면 기운이 쏙 빠진 내 몸같아서 속상하고 안타깝다.


살림살이는 갈수록 점점 줄어드는데, 자꾸만 또 비울게 없는지 생각하는 걸 보면 참 나도 나구나.싶다. 불필요한 물건 하나 없이 사는 게 지금 내 정신건강엔 압도적으로 유리하다는 생각에서다. 실체 없는 우울감에 한동안 노출되었던바 집에 돌아오고선 야물게 씩씩하게 설거지부터 해나갔다. 쓱쓱싹싹 반짝이게 구석구석 닦았다. 사특한 생각이 날 찾아올 땐, 걷기를 시작해. 글쓰기를 시작해. 청소를 시작해... 등등 이런 방식으로 즉각적인 개운법을 실천한다.


평소 메이크업을 하지 않는데, 오늘은 필히 기분전환을 해야한다. 그러면서 메이크업 파우치를 열었다. 파운데이션으로 피부톤을 정리하고 눈썹을 그리고 아이라이너로 살짝 스모키한 느낌을 연출했다. 속눈썹도 뷰러로 있는 힘껏 올렸고 블랙 마스카라로 뚜렷하게 했다. 메이크업 하나로 이렇게 기분전환 될 일인가.싶지만 효과적이다. 생기 있는 얼굴을 보니 기운이 났다. "그래, 초아야 완전한 생얼보단 과하지 않게 아주 옅게 요정도는 하고 다니자. 다른 것보다 너 자신의 기운을 위해서^^"


시시로 이런 방식으로 우울감이 찾아오면 분명 사라질 걸 알면서도, 이런 우울감이 반복되는 것이 속상하다. 이렇게 평생 살아야 하는 것인가.하는 정말이지 쓸 데 없는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올 때는 설상가상이다. 환장할 노릇인데. 삶은 정말이지 영적 체험의 장.임이 분명하다. 나에게는 물론 타인에게도 친절해야 하는 이유는 이것 하나만으로 충분하다.  


다시 일상을 회복해야 한다. 서른 초중반에 겪은 감정들이 얼마나 격했던지. 얼마나 사나웠던지. 그런 감정들이 오랜시간 내게 머물다 가는 걸 허락하고 싶지 않다.는 의지는 이토록 단호할 수가 없다. 그 어떤 것도 날 파괴할 수 없다.는 마음이다.


매 순간이 내겐 체험이다. 성장하고 있는지.알아차릴 수 있게 하는 것들 투성이다. 이십대, 삼십대 내 인생의 최대 실수라면, 생각이 나라고 착각했던 것.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낸 부정적 감정이 날 잠식하도록 방관한 것이다. 나의 지난 우울은 필연이었다. 내게 나.를 돌아보게 했고 나를 알아가는 길을 마련해주었고 삶을 알게 해줬다. 지나고나니 모든 것은 선물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칠흑같은 어둠 그 끝엔 분명 빛이 있거늘, 그땐 미처 깨닫지 못했는지. 이 또한 마치 우주가 날 위해 치밀하게 짜놓은 계획.이었으리라.


진짜 사람.이 되라는 이 우주의 큰 뜻이 아니었을까. 그땐 아무리 외쳐보아도 그 어떤 것도 알 수 없었는데, 신기할 노릇이다. 어느 순간 직관적으로 알게 되었으니. 삶은 절로 펼쳐지는 것이었다는 걸. 음이 있으면 양이 있다는 걸.


"초아. 그 누구도 대신할 수가 없어. 답은 네 안에 있어. 답은 너만이 찾을 수 있어. 그러니 잘 찾아보렴. 그리고 쫄지마. 할 수 있어. 그 끝엔 빛이 있을거야" 우주가 내게 속삭이고 있었던게 아닐런지.


공원을 걷다보면 호랑나비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 호랑나비를 보며 속삭인다. 그리고 느낄 수 있다. 너와 나는 하나라고. 너도 나고 나도 너라고. 너에게서 나를 본다고.  

작가의 이전글 내려놓을수록 술술 풀리는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