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로리 777 활동시간 4h 45m Km 21.2. 하루 페이서의 기록이다. 더운데도 기어코 긴팔을 입고 나섰다. 다소 즉흥적인 성향으로, 무작정 걸었다. 4-5시간 정도 정말이지 이곳은 내가 사는 곳이 아닌 여행지.라 생각하자. 여행왔다고 생각하자. 낯선 도시에서 온 여행자.라고 생각하며 오늘 하루 생소하게 그러나 즐겁게 다정한 시간을 보내보자.는 마음이었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옷 안으로 땀이 맺는 것이 느껴졌다. 햇볕 아래 선 찜통 같은 푹푹찜이, 그 공기가 불쾌하지 않았는데 그런 후텁지근함은 지나고나면 개운함이라는 기분좋음을 주기도 한다. 사우나에 와서 땀을 쪽 빼는 기분이고 싶었고 걸으며 땀을 쫙 빼고 싶었다.
둘러 볼 동네만 정했을 뿐 실은 도착지는 딱히 없었다. 골목길 곳곳을 걷기. 시장을 쭉 둘러보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낭만적이기 때문이다.
재래시장, 전통시장 가는 걸 이토록 좋아하는 서른 후반 여자 사람. 취미가 무엇이냐 물어보면, 개 중에 이것도 포함된다. "시장에서 장보는 일, 그러다 어느 노포나, 백반집에 들러 밥먹기." 정말이지 나란 사람. 다니면서도 이토록 하하호호할 수가 없다. 대학생시절에도 그랬으니, 어릴적부터 그랬으니, 어쩌면 지극히 개인적인 성향이겠고 취향이겠고 기호이겠다.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나는 이마저도 재밌고 감사하다.
실은 백화점 갈 일이 없다. 백화점에 가더라도 식품관이나 푸드코드 정도. 식료품에 한정될 뿐, 위층으로 올라가 무엇을 산 적은 손에 꼽는다. 한 때 마트에서 잘 팔지 않았던 딜이나 타임, 바질, 로즈마리 같은 허브를 살 때, 요리에 필요한 이국적인 향신료를 살 때를 제외하곤 갈 일이 없다.
그보다는 시장에서 휘뚜루마뚜루 채소, 과일 사고 두부사고, 즉석김사고 들기름 사고 하는 일이 내겐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취미라면 취미다.
시장 안에 있는 그릇가게 구경도 참 재밌는데, 옛날 감성 그릇들이 즐비하다. 올드한 감성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1980년대, 1990년대나 보았을 주전자며 식기들 구경에 시간가는 줄 모른다. 그러다 다소 촌스러운 듯한, 그러나 내 눈엔 예뻐보이는 잠옷도 하나 산다.
사람 사는 맛이 난달까. 누구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길을 걷는 것만으로, 그 바이브에 젖어든달까. 다정함이 날 반길달까. 내가 가는 시장 주변엔 구경할 게 꽤 많다. 천변길 따라 새벽시장이 매일 선다. 시장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천변 아래를 내려다보면 백로인지. 무엇인지 모르겠는 큰 새도 보인다. 일부러 새벽시장에 갈 때가 있는데 짹짹 까치의 지저귐이 녹아든 시장 바이브에 장바구니 가득 담으면 이토록 부자된 기분일 수가 없다.
생각이 좀처럼 걷히지 않아, 무작정 걸어 나선 참이었다. 나오면서 든 생각은, "우선 걷자. 몸을 움직이자. 무작정 걷자. 시장까지 쭉 걸어가보자." 집을 나온 순간 앞만 보고 걸어온 셈이다. 더워도 덥지 않았다. 한낮 땡볕 아래 땀에 흠뻑 젖으면서도 덥지 않았다. 걷고 있는 나를 알아차린다.
걷는 순간, 몸을 움직인 순간부터 분위기는 달라진다. 에너지가 조금씩 차오르는 게 느껴지는데, 그렇게 걷다보면 "아니 대체 못할 게 무어니. 뭐가 그리 두려운거야. 용기가 안나는 거야. 불안한거야. 무엇에 집착하는 거니? 이렇게 살아있음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니? 이 얼마나 소중한 순간이니? 시간이니?" 이런 방식으로 차분해진다. 침착하게 스스로를 다독이게 된다.
한 번 걸으면 도통 멈추지 않아질 때가 있다. 그런 날은 애써 멈추지 않고 걷기를 계속한다. 오늘이 그날이었다. 시장둘러 볼 때 구경하다 멈칫멈칫할 때만 빼곤 쉬지 않은 셈이다. 그럼에도 지치지 않았는데 걷기가 주는 그 설명할 수 없는 특유의 에너지가 유난히도 샘솟는 날이었다.
시계도 볼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럴 때면, 도대체 이렇게 걸을 동력이 어디에서 나는지 모르겠다. 그마만큼 답답한 거 일수도, 막막한 것 일수도, 도무지 앞이 안 보이는 것 일수도, 도무지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것 일수도, 도무지 답이 안 찾아지는 것 일수도, 제대로 된 질문이 속시원히 나오지 않는 것 일수도... 있다.
걷기.내게 이런 류다. 걷기는 내 삶, 내 일상 그 그자체기도 한데, 이렇게 기운이 유난한 날은 시장으로 목적지를 잡는다. 만족스러울만큼 걷다 시장에 들러 장을 보고, 어느 백반집에 들어가 음식을 주문하는 것, 맛있게 한 끼를 해결하는 일... 그 모든 것이 내겐 이토록 다정하고 살가울 수가 없다.
내게 낭만은 이런 것이다. 나다운 것. 취향 껏 행하는 것. 4시간을 넘게 걸으면서 생각을 부여잡지 않았다. 붙잡지 않았다. 그러려니. 내 현재 상황에 대한 무언가 막막하고 답답한 기분은 있었지만, 이내 "인생 어디 내 마음대로 되는게 있던가. 절로 펼쳐지는 것이지. 놓아버림. 놓아버리면 외려 더욱 선명해지는 것을. 놓으면 외려 더 잘 풀릴 것임을, 분명 또 다시 잘 살아나갈 것임을... 알면서 이런다니?^^" 요로코롬 끝을 맺는다.
어릴 적 아빠가 자주 포장해왔던 피순대도 판다. 달지 않은데 진하고 걸죽한 팥죽도 있다. 제육볶음 백반도 얼마나 맛있는지. 순대국밥은 얼마나 맛있는지. 그 정겨움의 정서가 내겐 꼭 알맞는 것이었다. 편안한 것이었다.
날 설레게 한다. 시장 가는 즐거움과 기쁨을 아는 자, 낭만을 아는 사람임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