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 떨이의 기쁨

by Aarushi

비가 와도 기어코 집을 나서 잠깐이라도 걸어야 한다. 산책해야 한다. 집착하는 것은 아니고 걸어야 생각이 걷히기 때문이다. 그 편이 집에 가만히 있는 것보단 내겐 이롭기 때문이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가을이 성큼 고개를 내밀겠지. 나 왔어!. 가디건의 계절이 왔다구! 시원해지겠지. 차가워지겠지. 나이 들어갈수록 차가운 계절이 좋아진다. 어젯밤 그리고 잔잔한 토요일 오후까지 빗소리는 다정한 자장가가 되어준다.


어제 저녁 8시 반쯤 대형마트에 갔다. 주로 집 앞 로컬푸드 직매장이나 식자재 마트에서 그때그때 장을 보는데, 이따금씩 대형마트에 간다. 대형마트에 가는 날엔 보통 저녁 8시 이후에 간다. 떨이의 즐거움이 있다. 떨이의 기쁨이 있다. 같은 값이면 이 시간에 가는 것이 내겐 왠지 모르게 이득인 것 같달까. 기분탓일 수도 있겠고 계산할 때 보면 확실히 알뜰하게 식자재를 샀다는 생각이 든다.


오징어도 반값이다. 오징어 3마리에 5,000원, 봉골레 파스타 해먹기 딱 좋은 바지락도 한 봉에 3천원에 살 수 있다. 닭이나 고기도 행사날엔 확실히 평소보다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다. 청양고추 1봉, 양배추, 단호박도 하나씩 카트에 담았다. 피넛 버터도 한 개 툭 카트에 넣고, 마늘도 행사 상품으로 큰 거 2봉 각 2,980원에 샀다. 꺄악. 내일 비도 올텐데, 점심으로 마늘 듬뿍 넣어서 알리오 올리오 해야겠다. 저녁으론 대패 삼겹살?... 카트를 밀면서도 혼자 이런 방식으로 레시피와 식재료의 조합을 생각하느라 분주하다.


마트갈 때, 장볼 때 설렌다. 신이 난다. 기분 좋아진다. 날 설레게 하고 기분 좋게 하는 나의 아주 고상한 취미 중 하나다. 내게 즐거움을 주는 것들이라면 내겐 고상한 것이다.


늦은 저녁 대형마트에서의 장보기는 떨이 상품, 행사 상품이 대부분이 된다. 떨이 상품에 대한 거부감은 전혀 없는데, 어차피 당장 내일 아침, 점심 곧장 요리를 할 것이기 때문에 유통기한에도 문제가 될 게 없거니와 시간차만 조금 있을 뿐, 재료의 신선도엔 문제가 없다. 게다가 가격도 반 값이니, 내겐 이보다 더 알뜰한 장보기가 없게 된다.


장 볼 때도 나의 무심함이 나오는데, 좋아하는 식재료가 분명해서 오랜 시간 걸리지 않거니와, 너.를 카트에 담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좋아하는 것들을 카트에 툭툭 잘도 담는다. 그러면서도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다정함도 잊지 않는다. "너를 데려갈테야^^ 같이 가자!"라고 말하듯. 나는 이런 방식으로 재료들과도, 물건들과도 대화하는 재밌는 상상을 한다. 모든 것엔 에너지가 있고 생명이 있다.


그릇들도 다 정리해 아주 간소하게, 용도에 맞는 것들로 몇 가지만 남았는데, 실은 그래서 컵도 딱 하나만 있다. 내 취향의 것인데 사이즈가 꽤 커서 믹스커피1봉이나 에스프레소 1샷 정도 사이즈의 컵이 하나 필요하다 싶었다. 그릇 코너에서 이것저것 둘러보다 결국 내가 선택한 건, 글라스 락의 작은 유리컵이었다. 아주 딱 알맞았다. 3,500원에 무심하게 스윽 카트에 넣었다.


작은 유리컵 하나에 이토록 기분좋은 일인가. 잘 사용할 생각에 기분좋아졌다. 역시나 이런 것이다. 내게 꼭 필요한 물건들은 내게 이토록 기분좋음, 풍족함을 준다. 장보기가 마칠 때쯤 시계를 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늘 그렇듯 내 장보기는 시간가는 줄 모른다. 이 또한 내겐 몰입이고 알아차림이고 명상이 된다.


저녁 9시가 훌쩍 넘어 마친 대형마트에서의 장보기. 그리고 떨이의 기쁨으로 금요일 밤 나는 정말이지 풍족함을 느꼈다. 이토록 사소한 것인데, 이토록 소박한 것인데, 나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가? 무엇이 널 그리 행동하지 못하게 하는가? 무엇이 널 그리 가둬두려 하나? 장보기 하나에서도 나의 사색은 멈추질 않는다.


돌아오는 길 잔잔하게 내리는 비가 복잡한 내 마음을 위로했고 안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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