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이라는 세계

by Aarushi

나는 앞으로 이 계절을 얼마나 몇 번을 더 만날 수 있을까? 알 수 없겠다. 죽음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 중 하나다. 그래서 이 계절을 더욱 사랑해야지.한다. 이십대 청춘이던 때만 하더라도 실존에 대하여, 삶에 대하여, 인간에 대하여 지금과 같은 통찰은 하지 못했다. 그때 만약 지금 알고 있는 걸, 깨닫게 된 걸 알았더라면 나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까?... 소용없는 아쉬움이란, 이런 것이다.


나를 안다는 건, 나를 알아간다는 건 결국 인정, 받아들임, 수용이기도 하다. 자신을 알게 되었다는 건 내겐 나를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과 같다. 받아들이니 편하다. 스스로에 대한 불만족스런 견해나 때론 자기 비난과 자기 혐오와 같은 사특한 것이 밀려와도 이제는 안다. 다 물러갈 것임을. 다 지나갈 것임을. 내가 아님을.


그러면서 넉다운 되듯 깨끗하게 인정한다. 더는 저항하지 않는다. 항복.이다.라기보다 긍정.에 가깝다. 아침 버스 창가쪽에 앉았다. 아침 햇살이 나를 격하게 반겼는데 눈꽃송이처럼, 꽃잎이 날리는 웨딩의 한 장면처럼 우수수 떨어지는 노란 낙엽을 바라보며 나는 또 다시 내 안으로 들어갔다. 자꾸만 내 안으로 귀결되는 걸 보니 고독과 정말 하나가 되었구나.싶다.


고독은 정말이지 내가 되었다. 나는 고독이 되었다. 내향적인(introvert)사람이기도 하지만, 나이 들어갈수록 고독에 더욱 가까워질수록 혼자가 이토록 편안하고 외롭지 않다. 혼자만의 시간이, 고요가, 평온 안에서 생의 기운을 받는다. 혼자여도 전혀 심심하지 않아서, 어떤 날은 "나, 이래도 되나?" 번뜩일 만큼 정말이지 요즘의 나는 더욱이 혼자다. 가까이 사는 조카가 저녁이면 놀러오라고 매일 전화하는데, 첫 마디가 "이모~ 뭐하고 있어?"하면 우스갯소리로 "이모~ 고독을 씹고 있오...^^"한다. 초등학교 2학년 조카가 완전하게 이해할리 없지만 언니가 옆에서 스피커폰으로 푸하하.웃는다. 그러면 나도 덩달아 함께 박장대소한다.


나는 진짜 고독을 씹고 있는 것인데, 이런 방식으로 나의 고독을 이야기하는 것도 즐겁다. 대학생때만 해도, 광화문 직장인 시절만 하더라도 핫플레이스, 힙한 곳에 놀러가는 게 좋았는데, 또 즐거웠는데, 음식점과 카페에 가는 것도 참 좋아했는데, 지금은 내 관심사에서 멀어졌다. 더는 흥미롭지 않다. 그래도 어쩌다가 좋은 친구들을 번화가에서 만나면 반갑고 어쩔 줄 모르나, 자주 보다는 어쩌다 한 번 보고싶을 때, 그리울 때 보는 편이 더 좋다.


지리한 고독이 내게 가르쳐준 것이 너무도 많아서. 날 살게 한 것들이라서. 그 끝엔 늘 알게 해주는 것들이 많아서. 깨닫게 해주는 것들이 많아서. 나는 나의 이 고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놓칠 수 없다.


고독을 아는 자, 자기 자신에 대해 치열한 질문을 던져 본 적이 있는 사람, 자기 자신과의 치열한 내적 대화를 나눠본 적 있는 사람일 거란 믿음이 있다. 고독을 아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있다.


고독해서 외롭지 않을 수 있었다. 고독해서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었다. 타인을 사랑할 수 있었다. 내려놓을 수 있었고 나 자신을 판단하지 않을 수 있었고 평가하지 않을 수 있었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보는 법을, 마주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내가 사랑하는 고전 작가들, 철학자들이 왜 그토록 고독.했는지. 고독.을 이야기했는지. 아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해되는 것들이 있다. 고독은 필연이었다. 한 인간으로서 고독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이나 세네카, 에픽테토스... 스토아 철학을 들여다보면 절로 끄덕이게 된다. 어느 문장을 만나게라도 되면 지금에 와서도 전혀 손색없는, 소스라칠만큼 들어맞는 통찰과 지혜가 있다.


고독은 배우는 것이 아니다. 고독은 그 누가 가르쳐주거나 그 어디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스스로가 던진 질문에 대해 고뇌하고 고민하고 어떤 날은 암흑 속으로 침잠했다가를 거듭하고 끝내 내 안에서 솟아나는 걸 발견할 때 절로 드러나는 것이다. 절로 경험하는 것이고 절로 얻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고독.을 이야기할 때 일반화 할 수 없는 것이란 생각이 있다. 사람마다 자기 만의 고뇌와 자기 만의 해석이 있기 때문이다. 고독에도 어디 정답이 있을까. 분명한 사실은 있다. 고독은 내게 유익하기만 하다는 것이다.


너무 고독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이 아닌가.하는 자각이 일면 고독을 조절한다. 고독 속에 갇혀 버리는 건 내가 바라는 게 아니다. 고독과 하나지만 고독이 날 잠식하지 않도록 하는 것도 나의 몫이다.


고독은 독학이었다. 치열하게 스스로 얻어낸 것. 농후하고 농밀한 사유와 사색은 내 고독의 도구가 되어주었고 이젠 사유와 사색과도 하나가 돼 버린 내.가 되었다.


버스 안에서 목적지에 다다르는 동안 "또 다시 이렇네... 나는 어느 순간 놓아버리는 경향이 있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회복될 때까지 정말이지 아무 것도 못하게 될 때가 있지... 침잠이라는 이 계절이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넌 늘 그렇게 잘 살아가잖아!. 그러니까 괜찮아..." 내적 독백이었다.


인정이었고. 수용이었다. 이 사색 끝 너무도 자연스럽게 늘 그렇듯 노트북 키보드로 손이 올랐는데 결국 고독.으로 귀결되었다. 고독을 사랑하는 나.로 귀결되었다.


눈빛에서 나의 고독이 보일 때가 있다.

고독한 사람.이란 걸 나와 마주하는 상대방이 알아차릴 것만 같은.


고독한 자는 외로운 사람이 아니다.

외로운 세계를 넘어 고독의 세계로 한 걸음 나아간 사람이다.


고독한 자의 눈빛은 내겐 아름답다.

영혼의 눈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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