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밝았다. 아침 산책을 스킵하는 날도 있다. 뭐든 집착하지 않으려고 한다. 집착하게 되면 할 일이 되고 짐이 되고 부담이 되고 사특한 마음이 인다. 창문을 열어 놓았더니 새벽공기가 기다렸다는 듯 코끝까지 밀려온다. 아직 침대 안이고 싶어... 그렇게 한 시간여를 밍그적밍그적 뒹굴뒹굴한다. 이 밍그적임이 실은 이토록 편안할 수가 없는 것. 창 너머엔 큰 나무 하나가 있다. 더불어 까치 소리까지 숲에 와 있는 기분을 들게 한다.
아침부터 분주하게 메이크업까지 마쳤다. 음영까지 넣었다. 지금의 나에게 메이크업이란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 되었는데 더는 화려하게 보이거나,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남에게 보이기 위한 치장으로서의 화장이 아니다. 순전히 날 위한, 유난히 메이크업을 하고 싶은 날 하게 되는 것, 기분을 업시키고 싶은 날, 생기에 생기를 더하고 싶은 날, 내가 기분좋아지기 위해서다. 아무리 생각해도 메이크업은 변신.이 맞다. 카프카의 <변신, 시골의사>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해충이 된 것과는 다른 의미의 변신이지만, 변한 내 모습이 이토록 매력적일 수 없는.것이 된다.
잔잔한 일상에서 내가 할 일은 해야 한다. 먹고 사는 문제, 나 자신 스스로를 먹여 살려야 할 의무, 책임감이 있다. 먹는 것도 잘 먹어야 한다. 건강하지 않으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싶은 것과 더불어. 다람쥐 쳇바퀴처럼 정말이지 별 다를 거 없는 일거리 내지 일상의 반복이지만, 실은 우리 모두는 각자 저마다의 순간들을 매 순간 경험하고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똑같은 일상이라 하지만 분명 어제와 오늘은 다른 것이다. 그 순간을 어떻게 향유하느냐에 따라 지루하지 않은, 고루하지 않은, 침체되지 않는, 잠수하지 않는 생기발랄한 순간들이 내게로 온다.
오늘은 다른 카페에 가서 다른 종류의 커피를 경험해 보는 일, 산책로의 방향을 새로운 곳으로 틀어보는 일, 도착지까지 한 두 정거장 전에 버스에서 내려 천천히 걸어가보는 일, 만나는 사람들에게 기분 좋은 인사를 건네보는 일, 먼저 웃어주는 일, 아주 작은 친절을 베풀어 보는 일... 실은 전혀 같지 않은, 매일이 새 날이 된다.
몇 년전, 프랑스 현대 미술가인 친구 파비앙의 전시가 광화문 일민 미술관에서 있었다. 그때 테마가 "매일이 너의 생일, Everyday is your birthday."였다. 그 문구가 날 사로잡았는데, 정말이지 매일이 내 생일이라면 어떨까? 지금 같으면 생일이 뭐 별건가.하며 무심해 하곤 하지만, 매일이 생일이라고 생각하면 정말이지 매일이 내겐 특별한 순간들이겠다.
잔잔함 속에서 특별한 순간들을 마주하는 건 순전히 내게 달렸다. 변신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자기 만의 동굴이 있다. 그것은 고독의 동굴일 수도 있고 쉼, 안식처와 같은 동굴일 수도 있다. 실은 하나다. 고독을 직접적으로 마주하는 일은 처음엔 고통스러울 수 있다. 지리멸렬한 외로움도 처절하게 겪어보면 고독을 수월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사진첩을 보다 주말이면 종종 찾던 베르사유 궁전 근처 사진들을 보게 됐다. 그때의 기억들이 몽글몽글하게 피어오르기 시작하는데, 그곳을 생각하면 나에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방황. 그리고 고독.이다.
실은 베르사유 궁전을 가기 위함이 아니었다. 최종 목적지가 아니었다. 파리 시내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 인적이 드물면서 한적하지만 파리 외곽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 파리에서 그리 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다 베르사유 궁전을 가게 됐고 가는 길에서 우연히 찾게 된 골목길을 용케 찾아낸 것이다. 발견한 것이다. 내가 찾아낸 루트, 그 길 위를 걷다 오는 것. 그 계절의 산책.을 경험하기 위해서였다.
이 길로 쭉 걸어가다 보면 베르사유 궁전이 나온다.
그러다 오후 4시쯤 지나서 역 앞 스타벅스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시고서야 기차에 올랐다. 그때 참 마음은 왈가닥처럼,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게 정말이지 나도 모르겠는, 외로움과 고독 사이의 시계추처럼 꼭 그랬는데, 내가 걷는 그 길은 이토록 고요하고 차분했었다. 그래서인지 더욱 파리 외곽의 이름 모를 도시의, 마을의 여느 길이 내게 이토록 위안이 되었나보다.
스틸 라이프가 적성인 건가.싶을 만큼 어떻게서든 고요한 일상을 회복하려고 하는 편이다. 집착하지 않기. 기대하지 않기. 만족할 줄 알기.는 나의 스틸 라이프를 더욱 성숙하게 한다.
이 글쓰기가 끝나면 이불 밖을 나가야 한다. 따뜻한 밀크티가 당긴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잘 나아가보자.는 뜻으로 의미 가득 담아 밀크티를 나에게 선물하기로 한다. 몇 천원의 밀크티 하나로도 충분히 행복한 나, 즐거운 나, 낭만 가득한 나... 희한하리만치 지금의 나는, 있어 보이거나 잘 보이거나 세련돼 보이거나 부티나고 싶어하는 것들과는 멀어져 있는 사람이 됐다. 나에게 만족할 줄 알면 진짜 내게 중요한 게 무엇인지가 남는다.
부가적인 것들을 하나씩 지워나가면 결국 진짜만 남는다. 본질만 남는다. 내.가 보인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 날 좀먹는 것들,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들로부터의 과감한 단절도 용기다.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하지 않기 위해 나는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할까?
그리고 왜.해야 하는가? 하고 싶은가?... 하는 옳은 질문도 필수다.
좋은 질문에 좋은 답이 나올 수 있다.
스틸 라이프는 순간순간 늘 진행되고 있다.
가는 길에 밀크티 한 잔 테이크 아웃할 생각에 룰루랄라.신나고 있다.
산다는 거 참 별 거 아니다.
행복하고 싶어.라고 말하지만 실은 행복하지 않은 것만 하고 있지 않은지.생각하면 답이 나온다.
행복은 순간순간에 콕 박혀 있음을.
그걸 쟁취하는 것도 결국은 나의 능력이겠다.
능력은 말 그대로 Ability.아닌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