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해하고 싶어

by Aarushi

차가운 계절, 주말 오후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오후 2시에서 4시 사이. 아주 한가로이 온전하게 나만의 시간을 갖고 나면 오후 5-6시쯤 저녁을 차린다. 배가 조금 출출해도 그 텅빔이 그 배고픔은 견딜만 한데다 서너시간 뒤 더 큰 행복감을 가져다준다. 그러면서 "오늘 저녁 뭐 먹지? 뭘 좀 만들어볼까나?..." 굉장히 즐거워진다.


아주 잔잔하게 들려오는 바깥의 지극히 일상적인 소음들도 날 방해하지 못한다. 책 읽거나 글쓰거나 하면 어느 순간 고요 속 그 어떤 소리에도 예민해지지 않는다. 침대 머리맡에 쿠션을 세워놓고 노트북이 세워질 만큼 비스듬히 앉았다. 이것은 누운 것도 아니고 앉아 있는 것도 아니게 된다. 무튼 글쓰기 가장 편안한 자세로 바로 잡는다. 왼쪽엔 책 한 권이 올라와 있고 물이 든 텀블러가 있다. 밀크티 한 잔으로 낭만 한 스푼 더했다.


나만 이런 걸까? 아니지. 아닐거야.하는 부분이 있다. 지금의 나는 이토록 혼자이기 때문인데, 너무도 편안해서 어쩔 도리가 없다. 기분이 다운되거나 가라앉거나 불현듯 두려움이나 불안, 우울감이 밀려온다 싶으면 이 상황을 타개할, 즉시 해결한, 삽시간에 해결 될만한 나만의 비장의 카드를 꺼낸다.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도, 내려 걸어서도 이내 곧 괜찮아 질 것임을 안다. "글 써야지."한다.


내겐 이만한 게 없다. 이만한 처방이 없다. 안 좋은 일이 있어도 이젠 자동반사적으로 글쓰기.를 시작한다. 심지어는 그 일 또한 소재가 되고야 만다. 그렇게 순식간에 몰입하고나서야, 그렇게 풀어내고나면 새로 태어난 기분이다. 머릿 속이 깨끗하게 정리되는 듯하다. 무언가 정화되는 듯한 청량감과 개운함이 있다.


무선 마우스가 고장이 났다. 어젯밤 침대에서 내리면서 마우스가 톡하고 떨어졌는데 아침에 확인해보니 작동하지 않는다. 건전지 문제도 아니었고 마우스 속을 들춰 안을 들여다봐도 이유를 모르겠는, 그런데 무엇인가가 분명 안 맞아서겠다. 오래 쓰기도 했고 미련 없이 다른 것으로 교체했다.


그렇게 하나를 비우고 새로운 하나를 채웠다. 묵은 걸 비워내는 건 유익하다. 오늘 당장에 비울 생각은 없었지만 절로 그리 된 것이라 생각했다. 아쉬움이라곤 없는, 비워내니 외려 개운한 것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어느 것 하나 실은 연결되지 않은 것이 없다. 가령 과연 아무런 이유 없이 마우스가 저렇게 됐을까?... 내가 사용하는 물건들에서도 많은 걸 읽을 수 있다. 읽혀진다. 잘 만 쓰고 있던 그릇이나 접시가 깨지거나, 갑작스레 작동되지 않는 물건이 생기거나 하는 것들... 그냥 쉬이 넘기기보단 한 번 더 생각하게 된다. 자꾸만 물건을 사게 되는 상황이 오면 가장 먼저 내 기운을 살피곤 한다.


지금 내 기운은 안녕한지. 나와 이 물건의 기운이 동한 건 아닌지. 개연성이라든지 필연성을 생각해본다.

그러곤 미련없이 아쉬움없이 두말없이 비운다.


고요하게 있다보면 새삼스레 고개를 돌려 내 방 그리고 바닥부터 벽, 그리고 천장까지 곳곳을 둘러보게 된다. 군더더기 없이 잘 정리된 방을 보고 있으면 내 마음은 더욱이 무해해질 수밖에 없어진다.


서른 넷부터였다. 살림살이를 확 줄여나갔고 내게 꼭 필요한 물건들만 남겼다. 책들이며 그릇이며 다 비워냈다. 사람 사는데 생각보다 그리 많은 물건들이 필요 없구나.를 깨닫게 된 시점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물건도 사용하는 물건만 줄곧 사용하게 되는 경향이 있는데 비슷하거나 같은 용도라면 두개, 세개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물건을 비우면 비울수록 물건이라는 범위를 좁혀나가면 나갈수록 내 마음이 더욱 충만해졌다. 그러다보니 물건을 살 때도 사는데 필요한 생필품 외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살 땐 나름 더 신중해지고 함부로 소비하지 않게 된다. 예쁘다고 해서 덥석 사는 일이 드물다. 집안에서 생활반경이 좁기도 하고 내 집 곳곳을 둘러봐도 복잡한 구석이 없다. 이토록 단출할 수 없는, 심플할 수 없는, 소박할 수 없는 집에서 살고 있다.


무엇보다 이런 살림살이는 내 정신건강에 이토록 무해하다. 내가 단출하니 물건들도 단출하고 물건들이 단출하니 나도 단출해진다. 반비례 할 수 없는 사이다. 고가의 물건들을 봐도 우와.스럽지 않은 것도 있다. 내 집에서 이미 충만한데, 내가 불편하지 않은데, 그것이 중저가든 고가든 실은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그저 코지하기 그지없는 이케아 패브릭 2인용 소파면 내겐 충분한 것이다. 확실하게 알게 된 것들이 있다. 정말이지 내면에 충실하면, 내 안이 고요하면, 평온하면, 내적인 성장에 다가가면 소유.보다 더 큰 가치에 대한 근원적인 갈망.이 생긴달까. 그 근원적 갈망은 자리이타의 삶이다. 타인을 위한 삶이 곧 나를 위한 삶이라는 걸 알게 되면 꽤 많은 부분에서 자유로워진다.


마흔이 가까워져서야 이렇게 조금씩 채워나가게 된, 나의 늦은 깨달음 혹은 내적 성장이 정말이지 감사하다. 요즘 혼잣말처럼 불현듯 "정말 감사해야 해요."라는 문장이 나온다.


무해한 순간들, 무해한 일상에서 나도 이토록 무해한 사람이고 싶다. 나 자신에게도 이토록 무해하길. 타인에게도 이토록 무해한 사람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내 몸과 마음이 건전한 상태인 것이 중요한데ㅡ 우선 잘 먹고 잘 자는 것에서부터 나의 무해함이 시작된다. 기운이 바로서야 무해한 향기를 내뿜을 수 있다. 단출한 살림살이들을 둘러보면 하나같이 무해한 것들뿐이다. 자연스레 그렇게 되었고 그 무해한 기운들이 나와 서로 에너지를 주고 받고 있다.


매 순간 사라지길 반복하는 찰나에서 오직 지금 이 순간만을 포착하는 일은 어떤 이유에서든 어떤 방식으로든 무해하다. 무해함.에 꽂힌 오후. 일으켜진 한 생각이 여느 날처럼 글쓰기로 날 이끌었다.


글쓰기의 이유도 실은 이토록 단순한 것이다. 무해하고 싶어서.

무해함이 이토록 강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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