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남이 해주는 밥이 제일 맛있다고 하지만, 갈수록 내가 짓는 집밥이 가장 맛있다. 아기때부터 먹어 온 엄마밥이 제일 맛있었던 것처럼. 내 손맛에 익숙해져서겠지. 이젠 엄마밥을 먹어 온 세월보다 내가 스스로 밥짓기 시작한 세월이 비등해진 탓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도 엄마밥이 무척이나 그리워질 때가 있다. 먹어도 먹어도 질릴리 없는 엄마표 제육볶음, 김치찌개, 소고기가 들어간 청국장, 감자 듬뿍 들어간 된장찌개... 갓 지은 고슬고슬한 된 밥. 사랑이었다.
유부초밥을 싸고 남은 유부로 샐러드를 만들었다.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와 함께 든든하고 맛있는 한 끼를 했다. 요리하고 먹고 난 뒤 그릇과 접시를 개수대에 놓으면서 생각하는 건, "어쩌면 인간은 먹는게 다일지도 몰라."한다. "다 먹고 살려고 하는 거다."라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니다. 먹는 일이 이토록 중요하다. 삶의 한 가운데 이리치이고 저리치이고 하는 순간들에도 곧장 허기와 배고픔이 밀려올 때면, 밥 생각이 간절하기라도 하면 안도한다. 안심한다. "이 상황에서도 밥 생각 나는 걸 보니, 밥이 들어가는 걸 보니. 뭐야. 별 거 아니잖아..."한다.
밥 한끼에도 사랑을 가득 담는 수준을 넘어 쏟아 붓는다. 퍼붓는다. 허투루 담기 보단 고루 그렇게 살살 잘 담아낸다. 혼자 먹어도, 혼자 먹어서 그래서 더욱 나 자신을 소중히, 살뜰하게, 따뜻하게 보살피고 싶은 마음이다. 내가 날 대하는 태도가 이토록 사랑스럽고 싶어서다. 내가 날 이렇게 대하지 않으면, 내가 날 이렇게 사랑하지 않으면, 내가 날 이렇게 바라보지 않으면 누가 날 이렇게 봐줄까. 나 뿐이다. 진실할 수 있는 사람은.
해가 저물어간다. 집 안팎의 채도와 명도 모두 스멀스멀 가라앉았다. 숨죽이듯 그렇게. 이 순간 듣고 싶어진 건 김동률의 <동행>, 그리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법>. 참 많이 위로 받았던 노래들. 덕분에 마음이 다리미에 잘 펴진 셔츠처럼 올곧게 펴지고 있다.
인생이 계절이라면, 나는 지금 어디쯤 왔을까?
봄에서 여름으로 갈 땐 세상이 무엇인지 몰랐다.
내가 누구인지 몰랐다.
그저 순진한ㅡ 순수한 어린아이였고 소녀였다.
그렇게 여름을 맞이했다.
여름은 찬란했고 눈부셨다.
호기로웠고 불안하지 않았다. 두렵지 않았다.
시도했고 넘어지고 일어서길 반복했다.
빛과 어둠은 하나란 걸 알게 되었다.
그렇게 일어서보니 가을이 내게 손짓하고 있었다.
나의 계절은 지리한 여름을 지나왔다.
가을의 초입에 다다르고 있다.
서른 후반.
인생이 계절이라면 나는 이제 가을이겠다.
나는 익어가고 있으니, 가을이 맞다.
익어가는 계절이 가을이라면 필히 그렇다.
이 계절 앞에서 나는 또 무수히 많은 선택들을 하게 되겠지.
그 선택들은 내가 되고 내 삶이 되겠지.
가을톤을 지닌 내 피부색이, 머리색이, 눈동자가 좋았는데
어느덧 내 나이도, 내 익어감도, 내 삶도, 내 인생도 내 외모와 일직선이 되었네.
많은 것에서 겹쳐지는 시기. 어쩌면 매 순간 내.가 되기 가장 쉬운 나날들의 연속일지도 모른다는 설렘도 있다.
이토록 찰나.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봄에서 여름으로
여름에서 가을로
이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오겠지.
겨울이 지나갈 무렵 나는 동면에 들겠지.
자연의 법칙은 이토록 치밀한 계획이구나.를 깨닫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이 계절을 이 가을을 만끽하는 것이겠다.
낙엽이 지면 지는대로 있는 그대로의 바라봄이다.
나이 들어갈수록
익어갈수록
깊어질수록
사람에 대한 애정이 짙어진다.
관계에 대한 확장의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 말, 눈빛, 웃음, 미소, 주름... 그 모든 것에서 나를 마주한다.
친절해야지. 사랑해야지.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에게서조차 친절과 사랑의 마음이 인다.
그들이 나라면, 내가 그들이라면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찌 친절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가을이여 내게 오라.
나는 기꺼이 너라는 계절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어.
잘 익어가볼테야.
절로 이는 나의 사색과 사유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니까.
질문하는 사람이란 걸 매 순간 확인시켜줘서.
이제 막 들어선 가을이.
그리고 언젠간 맞이할 겨울이.
두렵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