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고 하루 종일 어둠이 짙게 깔린 날씨에 대한 애정이 있다. 화창한 날보다 낮을 분별할 수 없을 만큼 스산하고 을씨년스러운 날씨가 내가 지구별 여행자임을 더욱 실감하게 한다. 나를 포함한 이 세상 만물이 고요하게 침묵하고 있는 것 같다. 꼭 잠들어 있는 것 같다. 인간, 동물, 식물... 실은 무엇이 다를까. 하나이겠지.
고요함 속에 평온이 내게로 깃든다.
추운 겨울엔 따뜻한 카페 라떼 아니면 밀크티다. 이 한 잔이면 그 어느 것 부럽지 않다. 차가운 계절이면 유난히 카페 콘 레체가 생각난다. 어느 해 겨울 스페인 그라나다 알함브라 궁전으로 오르는 길 위 작은 구멍가게에서 만난 카페 콘 레체와 초승달 모양의 버터빵을 잊을 수가 없다. 여행이란 그런 것이겠지. 낯선 그래서 자유로운.
내 안의 요정이 든 게 분명하다. 요즘 수시로 내 안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말들. 언젠가 엄마와 함께 바라본 제주 밤하늘에 수놓인 별들처럼 그렇게 쏟아져 내린다. 그러곤 내 심장을 쏜다.
"됐고 진행 시켜!"
"무슨 상관...?
"그러든 말든..."
"그러려니."
"그럴 수도 있지."
"캬하... 인생 그리 심각할 거 없었는데 말이야..."
"사는게 뭐 별거래?"
"네가 해 온 수많은 걱정들... 그래서 그렇게 된 게 있었니?. 없었어..."
"왜 두려운 거 같아? 왜 그런 것 같아? 잘 생각해봐."
"그 어떤 것에도 그 누구에게도 기대하지 않기."
"늘 그래왔던 것처럼 네 힘으로 씩씩하게 살아."
"살아있다고 다 사는 것일까?"
"아. 예. 침묵..."
"삶이란 거, 그리 심각한 게 아니었어. 이토록 아무 것도 아니었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라서 살아지는 거였어. 내맡기는 거였을 뿐."
"내 안의 두려움은 집착으로부터 온 것이었어. 알아차리고 나니 감쪽같아. 거짓말처럼 괴롭지 않아져."
"내 안의 파도는 나의 스승이었지."
"바다와 파도는 하나야."
"남의 인정은 나와는 상관 없는 것이 되었어."
"나에게 집중하면 모든 것이 풀리는 마법에 걸린다는 걸 알게 되었지."
"사람을 사랑하고 싶어."
"까짓 거 뭐. 그까짓 거 뭐... 하면 되지. 해볼테지."
"언젠 둘이었나. 언젠 셋이었고 넷이었나. 이 지구별에 혼자왔고 늘 혼자였고 여전히 혼자고 앞으로도 혼자이겠지."
"진짜는 말이 필요없는 법이지."
"나를 설명하지 말자."
"구구절절한 건 진짜가 아닐지도 몰라."
...............
수많은 별들은 내 심장을 더욱 튼튼하게 한다. 굳은 심지로 이 세상살이에 개의치 않게 한다. 상관없게 한다.
한 해의 끝자락에 이르면 어쩜 한 치의 오차 없이. 예측 가능하도록 한 해를 돌아보게 하는지.
작년 이맘 때 나는 생각했었다.
1년 후 나의 모습. 기대보단 어떻게 펼쳐질까.싶은 궁금증이었다. 드라마틱한 반전을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현실도 그랬다. 자꾸 하고 싶은 걸 미루니, 회피하니 정말이지 이룰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 때의 걱정들이란 하등 불필요한 것이었단 걸, 소용없었단 걸, 내 인생에 그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았던 걸. 남는 건 지나간 시간에 야속함이다. 스스로가 만들어낸 야속함인 걸 알면서도.
이제 더는 그런 야속함과 아쉬움과 후회로 한 해를 돌아보고 싶지 않다. 결과보단 과정 그 자체를 즐기고 경험하고 체험하고 깨닫는 사람이어야 한다. 사람 적성이란 게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인간 적성이 아닐까. 인간의 삶이란, 인간의 일이란, 지금 이 순간을 경험하는 것이다.
내 안의 요정이 불쑥 나타나 거침없이 말한다. "실천하지 않는 앎이 앎일까? 실천하지 않는 앎과 지혜는 죽은 것과 다름없어. 네 자신을 살아! 늦지 않았어."
글쓰기는 혼자일 때 강력해진다.
쉬는 차제에 이토록 혼자일 수 없으니 내 글쓰기는 더욱 고독해지고 짙어질 수밖에 없다.
도리가 없다. 쓸 수 밖에 없어서. 써야 되겠으니까.
자기 자신의 글을 보면 자기 자신이 보인다.
지금 이 순간을 살면 무엇이 두려울까. 무엇이 불안할까. 닿을 수 없는 것에 나 자신을 들이미는 건 지구별 여행자로서의 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구별 여행자로서의 나는 나 그리고 이 여정에 다정한가? 따뜻한가? 친절한가? 상냥한가?
내맡김도 받아들임도 내려놓음도 실천하지 않으면 닿을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