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적 상태

by Aarushi

저녁 9시쯤 LED조명 하나만을 켜 놓은채 몸을 바르게 한 후 앉았다. 호흡 명상을 했다. 들숨일 때 들어오는 공기가 코 끝 혹은 코 안의 솜털 혹은 콧등 뼈를 타고 비강을 타고 올라가는 듯한 몸의 감각을 느낀다. 반대로 날숨일 땐 숨을 내쉬면서 다시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공기 그리고 이어서 콧 속, 두 개의 콧구멍 사이로 숭 나가는 자극, 몸의 감각을 오롯이 느낀다. 어느 순간 호흡도 몸도 이완되면서 편안해지면서 방 안 너머 들려오는 사소한 혹은 미세한 소리란 분명 들리는 것임에도 나의 명상적 상태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20분이 5분내지 10분처럼 느껴진다. 지금 여기.에 머무르는 것.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 지금 완전히 여기 있게 되는 것.이 진짜 명상의 의미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이다. 나를 옥죄었던 불안과 두려움, 고통, 상처, 아픔, 슬픔, 그것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의도를 좀 내려놓고 정말이지 지금을 사는 현재를 사는, 진짜 살아있는 삶을 살자.고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나는 다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갖기 위한, 지금 여에 존재함으로써 행복해지는 방법을 잘 훈련해 나가는 것, Just be. 명상적 상태에 수시로 머무를 수 있게 되는 것. 알아차림을 알아차림하는 것이 수월하게 되는 것, 나의 바람이다.


유난히 쉬지 않고 두시간 여 걷고 싶은 날이 있다. 오늘이 그러했는데 집에 돌아와 만보기를 켜보니 2만보가 되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고 나서야 발바닥이 그렇게 피곤해지고 나서야 이제 그만 돌아가지.싶은, 그런 모먼트도 실은 내가 좋아하는 것 중 하나다. 걸으면서도 내가 걷고있다는 그 경험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 다시 말하면 알아차림을 알아차리는 것. 그 두 시간 반여, 세 시간 가까운 시간이 내겐 결코 걷기.라는 행위에 집중한 시간이 아니란 걸, 명상적 상태에 머무름으로써 나의 의도를 내려놓고 주의와 밸런스를 이루게 하기 위한 고도로 계산된 나의 전략이었다.


지금의 나는, 내가 통제할 수 없다는 것들에 대해선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실은 그 어떤 것도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일이란 없는데 그 전엔 왜 그토록 내가 모든 걸 통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지, 어떤 일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을 때조차 그것이 실패.라고 단정지으며 다 내 탓.이라며 자기 비하로 스스로를 괴롭혔는지.싶다. 이미 다 지나간 것들이라지만, 이따금씩 아니 수시로 혹은 시시로 밀려오는 지난 세월에 대한 아쉬움과 안타까움과 회한은 어쩔 수가 없다. 이 또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꼭 무엇을 해야만 하나?" "무엇을 하고 있지 않는다고 해서 뒤쳐지는 것인가? 무엇이 앞서가는 것이고 무엇이 뒤쳐지는 것이란 말인가?"하는 질문들이 쏟아지곤 한다. 그것은 자기합리화라기 보단 진심으로 내 자신에게 묻고 싶은 나와의 셀프톡이 된다. 그 질문을 다시금 긍정 확언과 긍정 셀프톡으로 바꿔나가야하는 것도 나의 몫이란 것도. 내가 나에게 하는 이야기를 바꾸지 않으면 어떻게 나를 변화시킬 수 있단 말인가?... 네가 두려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너는 네 자신이 되어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실은 "너는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는가?", "너는 살아있는가?"라는 질문과 같은 것이다.


새마음으로 키티가 그려져있는 줄노트와 형광펜, 오색 펜을 샀다. 마침 필기도구가 다해 새로 사야됐기도 했고 오늘부터 시작한 공부를 꼭 새마음으로 시작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키티 캐릭터를 좋아하는데, 키티하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이 있다. 유치원 때부터 초등학교때까지 멨던 진파랑 키티 소풍가방이다. 어릴적 사진을 보면 전부 그 가방이 함께다. 개구쟁이 꼬마 어린이 나의 모습과 그 가방이 어찌나 찰떡같은지. 그 가방에 대한 소중한 추억 그리고 사랑이 있다. 사소한 것 하나에서 오래된 나의 기억의 조각, 스토리텔링이 이는 걸 보면, 새삼 기억이란 뭘까. 과거란 뭘까. 미래란 뭘까. 현재란 뭘까. 우리는 진짜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현재밖에 살고 있지 않나? 그런데 왜 그토록 실재하지도 않는 미래를 걱정하며 불안에 떨며 살고 있는가? 실은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인데, 그래서 명상적 상태에 머무는 것이. 우리는 왜 명상을 해야만 하는지.실감하게 된다.


너무 불안하거나 두렵거나 우울할 때도 나는 글이 써진다. 글쓰는 것 역시 내겐 명상적 상태에 머무는 것, 명상 그 자체가 되기 때문이다. 그 순간만큼은 완전한 몰입을 경험하게 되는데 정말이지 글쓰는 동안 어떤 잡생각도 사특한 생각도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조차 모르게 되는, 알아치림을 알아차리는 순간이다. 고요이자 평온이다. 그 순간을 위해 명상하는 것이다. 행복해지고 싶어서 편안하고 싶어서.


이러다 금세 4월이 되겠네.하면서 괜한 걱정 혹은 불안, 두려움에 휩싸일 때가 있는데. "아니, 4월이면 4월이지 무엇이 그리 불안할까? 시간이 가는 것이 두려운거야? 진짜 네가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지 잘 들어다보렴. 그것이 진짜 무엇일지. 네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 아마 아니 분명 지금 여기를 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거야." 결국 나는 순간순간 수시로 세기 귀찮을 만큼, 힘들만큼 나와의 내면소통을 한다. 다다다다.오갈 때면 정말이지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일지. 어떤 존재일지. 뇌.는 무엇인지. 의식이란 무엇인지. 몸의 작용이란 무엇인지. 나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르겠다. 모른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이 밤 빈둥빈둥대다 방금 시계를 보니 자정을 훌쩍 넘겼다. 빗소리 asmr영상을 틀어놓고 써내려가는 글이란, 글쓰고 있는 나를 알아차리는 순간이란 이토록 고요하고 침착하고 차분할 수가 없다. 글쓰고 나면 나는 왜 이토록 편안해지는 걸까. 행복해지는 걸까. 하루종일 글쓰라면 글쓸 수 있을 것 같다. 글쓰는 일에 지루하거나 힘들어한 적이 없었고 나와의 내면소통이 점철되고 집약된 나만의 글쓰기가 순조로울 수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있다. 꾸밀 것이 없으며 가식적일 수 없으며 솔직해질 수 있는 확실한 내면의 통로이기 때문이겠다.


집 근처 새로운 산책로를 발견했다. 분명 본래 있었을 텐데 분명 내가 그냥 지나쳤던 곳이었겠다. 평소 내가 걷는 산책로보다도 실은 내 취향의 산책로였다. 그 길을 따라 걸어오면서 생각했다. "분명 본래 있었을텐데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저쪽 길로 한 번 가볼까?그렇게 시작된 몸의 움직임 즉 내 발걸음이 새로운 산책로를 발견하게 했다. 내일부턴 이 산책로로 걸어보자.라는 생각과 함께.


잘 가는 것 같으면서도 여전히 꿈뻑 그것도 자주 길을 잃는다. 그러면서도 잘 간다는 것이 있는가?싶고 뭐 그렇게 펼쳐지는 것이 내 인생이라면 그 또한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마음도 불쑥인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어릴적부터 나의 이십대, 삼십대에 불안과 두려움과 무기력감을 기꺼이 받아들일 걸. 과감하게 직면함과 동시에 나 자신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고 사랑해 줄 걸.


펼쳐진 삶에도ㅡ 빛도 있고 어둠도 있고 기쁨도 있고 슬픔도 있었다. 마냥 좋았던 적도 마냥 안좋았던 적도 없었다. 빛과 어둠이 무엇이 다를까. 기쁨과 슬픔도 무엇이 다를까. 좋음과 안좋음이 어디 다를까. 그러니 자기 생을 판단하지 말자.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렇게 따뜻한 방에 앉아 글쓰고 있는 나. 이미 "있음"에 만족할 줄 알고 지금 여기, 이 순간을, 현재를 충만하게 사는 나. 내가 행복하면 타인을 행복하게 할 수 있고 타인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곧 나 자신이 행복해지는 길이란 걸, 이렇게 마흔 가까이 되어서야 절실하게 알게 되었다. 지금이라도 알게 되었으니 이 또한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글쓰기로 나는 이토록 행복한 사람이 된다. 언제부터인가 나와의 셀프톡은 순전히 솔직하고 어느 날은 이토록 순수하고 어여쁘고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살아있다고 해서 살아있는 것일까? 진짜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일지. 살아있는 삶이란 무엇일지. 내겐 명상적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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