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녹여버려요

by Aarushi

그런 날이 있다. 내 머릿속에 생각한 아주 작고 사소한 바람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곧장 내게 찾아오는 현실. 나는 꽤 자주 그런 편이다. 오늘 저녁엔 가는 길에 마트에서 오징어랑 만두를 사갈까? 생각했는데 그날 오후 엄마가 보낸 택배 속 그 많은 먹을거리 중에 오징어와 냉동 만두가 떡 하니 있다던지, 오전에 자두 생각을 했는데 오후에 누군가가 자두를 건네준다던지 아주 작고 사소한 것에서 요로코롬 생각한 것이 현실이 되는, 되어 있는, 나타나는 재밌고 신기한 경험, 그러면서도 딱히 호들갑떨거나 유난하지 않는, 이 또한 지금 여기.로 펼쳐지는 순간들. 오늘도 꼭 그러했다.


일하러 가기 전 그 주변을 한 두시간여 산책하다 카페에 들어가 글 한편 쓰다 갈까.생각했다. 나오기 전 어제 선물받은 스벅 e카드 교환권을 등록하면서, 오늘은 오랜만에 스타벅스에 갈까? 이 쿠폰은 텀블러 구매에 써야지 생각하곤 아메리카노 톨 사이즈 쿠폰이 있었음 좋겠다, 아님 뭐 따로 결제해서 마셔야겠군.그렇게 생각했던 터였다. 그런데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문자 메시지 2개가 울렸다. 카페 아메리카노 T 스타벅스 쿠폰 2개가 도착한 것. 어머나!. 이런 선물이!. 놀랍거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한들 이런 일들이 펼쳐질 때면 순간적으로 꺄약.하게 된다. 분명 조금 전에 스벅 아메리카노 톨사이즈를 생각했는데 말이다.


우연이었겠지만서도 우연도 실은 필연임을 나는 안다. 집을 나서는 길이 어찌나 룰루랄라던지. 마흔이 다 되니 이젠 정말이지 중년으로 접어드는구나.싶고 삶이란 게 정말 이런거였을까?싶고 남은 나의 삶을 어떻게 잘 살아가야 할까? 나는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까? 나는 어떻게 죽어가야 할까? 죽음을 더욱 명징하게 알아차리게 된다. 산다는 건 실은 죽어가는 것이고 생사여일. 생과 사는 같으니 실은 죽음을 잘 준비한다는 건 잘 살아가겠다는 것과 같다.


비오는 거리를 걷는 중에 띵똥. 문자 하나가 왔다. 병원에 입원해계시는 할아버지였다. 이틀 전 보낸 문자를 이제서야 보신 모양이다. 숫자로 2만 와 있었는데 할아버지께선 아무 것이나 눌러서라도 할아버지가 손녀의 메시지를 봤다는 걸 알리고 싶으셨을 것이다. "할아버지 사랑해요(하트), 내일 뵈러 갈게요!"답장 하려던 찰나 전화가 왔다. 할아버지다. 전화를 끊고 마음이 괜시리 울컥하면서 정말이지 씩씩하게 살아가는 손녀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일 새벽버스를 타고 수원을 갈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분주해지는 건 무얼까.


얼마전 선산을 다녀오면서 든 생각과 이젠 정말이지 연로해지신 조금씩 스러져가는 내 할아버지의 몸과 얼굴, 목소리, 언젠가 맞이할 모두의 죽음... 그 모든 것들이 내게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가는 하루다. 운전하는 내내 우두둑 떨어지는 빗소리와 내 눈물의 글썽임이 이토록 조화롭게 때로는 환하게 빛나게 때로는 구슬프게 서럽게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우리는 도대체 왜 태어난 것일까?

"한 번 왔으면 한 번 가는거여."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당찬 할머니의 말에서 나는 정말이지 우리네 삶, 그리고 인생이 느껴졌다. 그러니 우리 서로 무조건 사랑해야 한다고. 그러니 우리 서로 무조건 친절해야 한다.고.


그렇게 걸으며 우연히 길 모퉁이에서 만난 작은 도서관 2층에 와있다. 책을 보는 사람들, 노트북을 하고 있는 사람들, 무언가를 적고 있는 연인의 모습도 보인다. 창밖 너머 풍경은 비오는 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들, 가게들의 오픈 행렬, 쓸쓸하게 다정하게 내리는 비, 내 앞에 펼쳐진 초록 연두 수풀나무의 향연... 세상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이구나.새삼 느낀다. 이것이 풍요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것이 사랑 아니고 무엇인가. 이것이 경이로움이 아니고 무엇인가.


요즘 나의 화두는 단연코 마음을 녹이는 것이다. 용서란 마음을 녹이는 것, 과거로부터의 단절, 끊어냄. 나아감이다. 가장 먼저 나 자신을 용서하고 타인을 용서하고 오로지 내어주기만 하자, 그러고 싶은 마음. 알아림으로써 지난 내 모습 모두를 사랑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놓아주는 것. 쉼없이 내 안에서 울려퍼지는 소리다.


사랑합시다. 사랑해요!

감사합니다.

받아들입니다. 연민합니다.


내일 새벽 수원으로 향하는 버스 안 창밖 너머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또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지금 여기. 오로지 그 뿐이다.


"마음을 녹이자. 그냥 놓아버리면 되는 거야. 모든 걸 녹여내자. 그러면 자유로워진다."

이 모든 건 결국 나 자신을 위한 것이란 걸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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