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하게 소소하게 기분 좋은 순간은, 아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 중 하나는, 샤워를 갓 하고 나온 뒤, 선풍기 바람을 맞을 때, 머리카락은 젖은 채로 왔다갔다 상큼한 향이 나는 토너를 토닥토닥 얼굴에 바를 때, 그러고 난 뒤 뽀송뽀송한 침대 위 이불 속으로 점프할 때... 이만한 행복은 없다고 느낀다.
오랜만에 대학시절, 직장인 시절 자주 듣던, <남과여>,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를 재생하곤 이 밤 잘 준비를 한다. 침대에 쏙 들어간 순간, 글쓰기가 하고 싶었던 것. 노트북을 가져와 무작위한 의식의 흐름따라 글을 써내려가고 있는 중이다. 선풍기 미풍의 바람을 얼굴로 맞으며 이 밤 글쓰고 있는 나를 알아차린다. 지금 나의 기분은 어떠한지. 오늘 나는 어땠는지. 내가 진짜 원하는 건 무엇인지. 그렇게 순간을, 하루를, 내 일상을 돌아보기도, 나아가기도 하는 밤이다.
몸무게가 부쩍 늘었는데, 팔뚝살이라든지 복부의 군살들이 나를 반긴다. 아무렴 어떤가? 잘 먹어서일테지^^ 몸무게가 는 덕분에 얼굴살이 붙어 건강해 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좋고 나쁨도 없는 것이다. 지금도 이렇게 보기 좋은데 46-48kg가 나갔을 땐 정말 살이 없었구나, 말랐던 거구나.를 실감한다. 마른 것보다 건강한 것이, 잘먹고 잘자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도.
늦은 오후쯤 옷정리를 했다. 정리할 것도 없을 만큼 옷이 정말 없는 편인데도 시시로 들여다보고 정리하는 편이다. 몇 년 전, 내 삶의 태도와 가치관이 변하기 시작한 후부터는 옷들도, 신발도, 가방도, 살림살이가 정말 간소해졌다. 이 간소함이 날 깨어있게 한다. 옷도 웬만해선 사지 않는다. 한 달 소비 중 옷을 사는데 드는 비용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 일년 해봐야 하나 살까.싶다. 겨울 자라 세일때 사두는 정도.
그러다보니 옷장이라고 해봐야 이토록 간소할 수가 없는데다 내 취향의 편안한 옷들만 남았다. 여름엔 샌들 하나면 충분하고 옷도 늘 롱 니트 스커트를 즐겨 입기 때문에 롱스커트 한 두개면 충분하다. 내 취향의 베이지나 화이트 원단의 루즈한 핏 아니면 짜임이 있는 니트류 스타일이 전부다. "초아씨는 왜 맨날 똑같은 옷만 입어요?"라는 말을 들었을 만큼, 지금의 나는 화려함이나 있어보이는 것엔 관심이 없고 편안하고 수수해보이고 간소하고 단출한 스타일을 선호하게 됐다.
광화문 직장인 시절엔 그토록 멋.부리고 다녔는지 싶을 만큼 그 시절의 내가 보면 놀랄 일이다. 서른 후반 나이에 살림살이가 이토록 없을까 싶을 만큼 무엇을 쉬이 들이지 않는데, 지금 이 살림살이도 더욱 간소하게 하고 싶을 때가 있다. 비우는데 익숙하고 빈티지 오래된 것에 대한 애정이 있다.
몇 년 전 황학시장 골목에서 개당 삼천원에 산 영국산 빈티지 매트 두개는 훌륭한 인테리어 소품이 됐다. 주말이면 혼자 이태원 앤틱숍에 들러 구경하는 것도 좋아했는데 그 시절의 내가 오버랩되면서 어김없이 삶이란 이토록 찰나구나 싶다. 이십대의 나는, 서른 초반의 나는 실은 없다. 사라지고 없다. 기억만 있을 뿐. 그러니 지금의 나도, 실은 얼마나 찰나인가.
써내려가고 나니 역시나 내 사유의 이토록 무작위함을 알아차린다. 나와의 내면소통은 이토록 즐겁고 시간가는 줄 모른다. 내겐 글쓰기란 명상 다름 아니다.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 끝에 찾아오는 극강의 편안함이 있다.
살아보니 무얼 그리 갈망하며 살았을까? 무엇이 되려 했을까? 뭐 그리 심각하게 생각했을까? 일도, 사랑도, 사람관계도 뭐 그리 심각하고 대단하게 생각했을까? 결국 나 자신이 가장 중요했다는 걸,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것의 근원이었단 걸 이렇게 나이가 들어서야 알게 되었다.
토너를 바르면서 거울에 비친 내 눈을 바라보았다. 눈이 눈을 볼 수 없는 것처럼. 다행히 내 눈빛은 안녕하다. 여전히 불안하고 두려움이 밀려오고 우울감이 밀려오곤 하지만, 다 지나가는 것임을, 모든 것은 변하는 것임을, 이 또한 절로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임을 알아차리니 더는 그 어둠 속에, 그 감정에 매몰되는 경험은 쉬이 하지 않게 된다.
마흔이 되면 마흔앓이.처럼 "마흔이 될 때까지 난 뭐했나?"하는 생각들로 우울해진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는데 내가 막상 그 나이가 되니 "난 마흔이 될 때까지 뭐했나?"라는 생각보단, "나는 정말 죽어가고 있구나." 외려 "죽음"을 명징하게 알아차리는 삶을 살고 있다. 인생의 많은 부분이 실은 운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니 어떤 삶도 더 잘 난 삶도 더 못난 삶도 좋은 삶도 나쁜 삶도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곧 마흔이구나. 마흔이후 나는 정말이지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나는 정말이지 죽어가고 있구나. 이렇게 찰나라니. 나는 분명 죽는다. 나는 필멸자다."
어른이 된다는 건,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내게 가장 소중한, 나와 가장 가까운 가족들의 죽음이 곧 다가오고 있음을, 그들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시기가 점점 다가오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그 과정에 있는 것 같다. 내가 먼저 일 수도 있다는 것도 잊지 않을 뿐더러 연로하신 할아버지, 할머니, 이제는 정말이지 연약해진 내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 뒤돌아 눈물을 훔치는 나이, 나는 꼭 그런 나이가 됐다.
올해 초, 제주도에 엄마를 보러 갔을 때, 나는 새벽 4시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혹여 들릴까 다른 방에서 숨죽이며 그렇게 침대에 누워 하염없이 흐느꼈다. 나이 든 엄마의 모습, 부쩍 연약해진 엄마, 살집 두둑했던 엄마가 지금은 살이 빠진 모습, 흰머리가 많이 보이는 엄마의 모습에서, 손등 주름이 가득한 엄마의 모습에서, 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어느 새 배게가 내 눈물로 흠뻑 젖어 차가웠던 그 날 새벽의 기억이 고스란히 내게 남았다.
나는 아직 내 부모님을 보내드릴 준비가 되지 않았다. 언젠가는 마주하게 될 내 사랑하는 부모님의 부재가 아직은 두렵고 가슴이 미어지고 생각하기 조차 싫을 만큼 그런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겠지만, 나도 필멸자이며, 나도 스러져가겠지만서도 외려 나의 부재는, 나의 죽음은 두렵지 않다. 나이 들어가고 있음이 분명하구나.를 이런 방식으로 부쩍 실감한다.
지금의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무엇이 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과 내 삶을 내 스스로가 책임지고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고귀하고 아름다운 삶이 아닌가. 그것이 존귀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 모두는 각자 자기 만의 전투를 치르고 산다. 자기 안에서 얼마나 많은 번뇌와 고통과 두려움과 불안과 우울을 삼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가. 언제부터인가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도 존귀하고 타인도 존귀하고 아름답고 대단하고 멋지고 눈부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무얼 이뤄내지 않았어도, 지금까지 무엇이 되지 않았어도 나는 내 삶을 마흔 가까이 무사히 지켜내 왔고 마흔 이후부터의 삶은, 자리이타의 삶을 살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남에게 이로운 삶, 결국 남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날 더 행복하게 한다는 걸. 내가 이 세상에 온 이유,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을 경험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알아차림의 삶이 나를 좀 더 촘촘하고 단단하게 해줬다. 여전히 나약할 때도 있지만 그 나약함이 더는 자기 비난이나, 자기혐오가 아니라 수용과 감사, 자기 연민, 용서로 나 자신을 더욱 따뜻하게 사랑하게 해준다.
삶이란 게, 정말이지 이토록 찰나.였다. 나는 언제든 죽을 수 있다고 매 순간 알아차리며 사는 삶이란, 내게 주 저함과 머뭇거림을 용기로 당당함으로 바꿔준다. 나는 아직도 더 따뜻해져야 한다고 셀프토크를 한다. 한없이 따뜻하고 싶고 한없이 친절하고 싶고 한없이 사랑하고 싶다.
존중과 감사, 친절함과 따뜻함, 사랑... 의 마음으로 나를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것. 진정 바라는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