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벅 음료 쿠폰을 종종 선물받을 때가 있다. 그런 날은 총총걸음으로 텀블러 하나를 들고 방문하는데, 직원분이 "자비님, 주문하신 바닐라 크림 콜드 브루 나왔습니다!"라고 부르는 걸 듣곤 "참 자비. 내가 자비.라고 앱에 저장했었구나." 안먹어본 메뉴를 주문했다. 일하러 가기 전, 이렇게 또 다시 짤막하게나마 글 쓸 여유를 갖는다. 늘 그렇듯 글써야지.가 아니라 내 마음이 늘 흘러가는대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싶으면 싶은대로 글쓰고 싶으면 싶은대로 노트북을 꺼내어 쓴다.
음료를 들고 자리로 돌아오면서, "자비. 난 이 자비.라는 말이 참 좋아. 혹여 아이 엄마가 된다면 자비.라고 이름지을까?"싶을 만큼. 자비. 나를 사랑하고 나와 같이 타인을 사랑하는 것. 부쩍 가슴 속에 새기는 말이다. 앱에 닉네임을 계속 자비.라고 두어야겠다.
나이들어가며 좋은 것 중 하나는, 지나온 나 자신의 경험, 스토리를 통해 어느 정도는 나 자신이 원하는 걸,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지 않은 걸 선별해 일상에 하나하나 스며들게 한다는 점이다. 요즘 부쩍 드는 생각은, "우리는 어쩌자고 자기 학대를 하며 살아가게 되었는가?"실은 우리=나.다.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우리는 어쩌자고 내 안의 신성을, 진짜 나.를 만나는 일과의 단절, disconnection.의 삶을 살게 되었는가?" 창밖너머 살랑이는 바람에 부내끼는 초록잎들과 눈맞춤하며 내 안은 내면소통으로 고요한 시끌벅적임에 야단법석이다.
시끌벅적한 도심의 스타벅스 안에 있어도 내 안에 집중하면, 글쓰기하면 혹은 창밖너머 한 곳을 응시하며 그곳에 주의를 집중하며 고요 속으로 침잠하면, 실은 도시의 그 어떤 시끌벅적함과 소음도, 사람들의 음성도 아무 것도 아니게 된다. 오히려 그 시끌벅적함 속에서의 고요가 날 더 깨어있게 한다. 텅빔으로써 가득참, 시끌벅적함으로써 고요함, 이런 것들이 날 알아차리게 하고 우울에서, 불안에서, 두려움에서 제자리를 찾게 한다.
오늘 아침, 샤워를 하면서 문득, "나는 중년인가?"하는 질문이 반짝 일었다. 38, 39.과 40.의 경계 때문일까. 실은 청년이란 것도, 중년이란 것도, 노년이란 것도 실체가 있는 것일까? 중년이라고 할만한 것은 무엇인가? 육체라는 껍데기를 빌어 사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육체요, 이 몸 일것이고ㅡ 그렇다면 나의 정신은? 의식은? 영혼은? 진짜 나는? 진짜 나.는 나이가 없다. 그저 고요함 그 자체다. 그래서 청년이라고해서 야단 법석일 것도 중년이라고 해서 야단 법석일 것도 노년이라고 해서 야단 법석일 것도 죽음을 두려워할 것도 없다.
누구에게나 젊은은 있었고 누구에게나 노화는 당연한 것이며 누구에게나 죽음은 예정되어있다. 마흔 언저리에 와보니 몸은 분명 생리학적인 변화와 노화의 징후가 분명해보이지만 내 정신은, 내 의식은 외려 더욱 확장되어간다는 생각이 있다. 의식의 확장 역시 나이가 없다. 그러니 그 확장이란 외려 태초의 순수와 젊음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사회적인, 현실세계의 나이의 기준인 중년이 되었다 한들, 그 어떤 것도 날 판단하거나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때가 있다. 뭘해도 수월하게 흘러가는 때, 뭘해도 참 안되는 때, 흘러가는 물처럼, 흐름처럼. 마냥 좋은 일만도 마냥 안좋은 일만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인생이란 걸 말이다. 작년 가을부터 지금까지 내겐 쉼.의 시간이 주어졌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말 즉슨, 자칭 "쉬어가는 타임"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는데, 내 맘대로 되지 않는, 될 듯하면서도 자꾸만 어그러지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도 있었고 이전과는 분명 다른 막힘.이랄까.하는 것들이 경험적으로, 직관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럴 땐 몸을 사리는 것도, 불안해하기보단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차분함과 고요함 속에 나를 내맡겨 그 다음을 멀리 바라보는 편이 이롭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러니 내 마음 같지 않은 일에, 현실에, 상황에ㅡ 나 자신을 비난하거나 자기 학대를 통해 더 큰 괴로움에 빠져 시간을 허비하기 보단 이렇게 여유롭게 유유자적하며 나.를 돌아보는 것이, 집착하지 않는 것이 결국 내 인생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이렇게 또 알아차리고 배운다.
이 세상은 어쩜 날 알아차리게 하는 것 투성인지. 대신, 걷거나 내 눈 앞에 펼쳐진 대자연의 경이로움에 감탄하고 감동하고 감사해하고 지금의 못미더운 나의 현실이나 나의 모습을 이제는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고 그럴수록 더욱 안아주고 보듬어주고 보살피고 다독여주고 감사해하고 용기를 주는 일, 실은 그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것도.
"가만있어보자. 내가 곧 마흔이니까.
운좋게도 무탈하게 큰 병 없이 산다해도 길어야 80이지 않을까?
그것도 아주 운이 좋아야 한단 말이지.
꺄악. 지금껏 내가 살아온 만큼 딱 그만큼 아님, 그보다 덜 남은거잖아?
이토록 찰나였던거야? 이토록 소중한 삶, 순간순간들이었단 말이지?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내 부모님은 그보다 덜 남았잖아?
함께 할 시간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면? 지금 잘하자. 지금 감사함과 사랑을 듬뿍 표현해야해.
지금 잘해야 해. 부모님을 정말이지 사랑해야해!
서로 사랑하기도, 친절하기도 부족한 시간이었던 것을!
정신 차리자! 감사해하며 지금 이 순간을 살자!!!!"
이런 내면소통이 하루에도 여러 번 인다.
삶이란 버겁고 힘겹고 고통스럽고 괴로워서 그래서 아름답고 고귀하고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