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옷이 아니라, 새로운 눈이었다

기존의 나에 새로운 나를 겹쳐 입는 일

by 빛영

어제 쇼핑몰에 들러 무게감 없이 착 떨어지는 옷 세벌을 샀다.

피팅룸에서 입어 보니 생각했던 느낌과 착용한 모습이 거의 일치했다.

집에 돌아와 택을 떼고 드레스 룸에 가지런히 걸어 두었다.


오늘 아침, 들뜬 마음으로 새 옷을 꺼내 입었다.

그런데...


밝고 하얀 조명아래, 한 벽면이 모두 거울이던 피팅룸에서 본 모습과는 뭔가 달랐다.


'어.. 이게 아닌데...'


어울릴 줄 알았던 세 벌의 조합은 생각보다 둔해 보였고,

결국 기존의 여름옷들을 꺼내 하나하나 코디해 보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작년에 입었던 옷들과 새 옷이 만나자

기대하지 않았던 조화가 만들어졌다.

예전엔 단조롭게 느껴졌던 옷들이, 새로운 스타일의 자극을 받으며 생기를 되찾았다.


어제저녁, 새 옷을 옷장에 들이며 옷장을 정리했었다.

계절을 구분하지 않고 마구 뒤섞여 있던 옷들 사이에 새 옷을 걸기엔 뭔가 기분이 나지 않았다.


'마음에 쏙 드는 옷들이 정돈된 상태로 걸려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생각 하나로 먼지 뒤집어쓰며 오랜만에 드레스룸을 단장했다.

공기청정기까지 가동됐다.


기존의 옷과 새로운 옷이 섞이자 다양한 스타일이 가능해졌다.

처음엔 새 옷으로 쫙 빼입고 출근하려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됐다.

낯설었던 옷이 기존의 것들과 섞이자

오래된 옷도 새롭게 보였다.

익숙한 것들이 새로운 자극을 만나 더 풍요롭게 활용되듯,

조금의 변화가 일상 전체를 다르게 보이게 했다.



새 옷과 기존 옷을 조화롭게 입게 된 경험은 새로운 배움을 대하는 태도와도 닮아 있었다.



생각해 보면, 새로운 공부를 시작할 때도 비슷했다.

과정을 모두 마치면 그 배움과 관련된 성취물이 꼭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실패한 것 같았고,

예상치 못한 장애물을 앞에서는 금세 좌절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됐다.

새로운 분야를 익혔다는 것만으로도 기존 삶이 풍요로워졌다는 걸.

배운다는 건, 그 자체로도 충분했다.


보고, 듣고, 배우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좁았던 생각의 폭은 넓어졌고,

익숙했던 일상은 더 가볍고 다채롭게 느껴졌다.


지금은 안다.

모든 경험은 당장 성과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걸.

과정이 나를 넓혔고,

그로 인해 이전보다 수월하고 편안한 일상을 살아가게 되었다는 걸.




새 옷을 사기 전에는 입을 옷이 없다고 느꼈다.

스타일도 표현하기 어려웠고, 선택지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단 세 벌의 새 옷이 기존 옷들과 어우러지며

생각보다 많은 가능성이 숨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선택지는 내 옷장 안에, 그리고 내 안에 이미 있었다.


단 하나의 새로운 경험, 작은 배움조차

기존의 삶을 낯설게 바라보게 한다.

그 낯섦은 결국 내 안에 있던 또 다른 나와의 만남이 된다.


새로운 나를 입어보며,

여러 겹의 나를 통합해 간다.

삶이란, 기존의 나에 새로운 나를 겹쳐 입는 일이다.

그리고 그 여정은 생각보다 훨씬 자유롭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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