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친 복용은 몸에 해롭습니다
글 | 찰리
뉴스에 따르면 이번엔 K방역이 대세라고 한다. ‘두유 노 김치?’ ‘두유 노 강남스타일?’을 질문하던 시절을 지나, BTS 신드롬, 영화 <기생충> 아카데미 수상에 이어 바이러스 방역까지. ‘K’ 스타일이 이제 세계에서도 먹히는 걸까. ‘케이 XX’은 때론 ‘국뽕’을 자극하는 이슈가 된다.
국가와 마약의 은어인 뽕이 합쳐진 말, 국뽕. 이 합성어는 조롱의 의도가 명확하지만 가끔은 나도 모르게 젖어들 때가 있다. 나는 이럴 때 국뽕, 아니 ‘K감성’에 취한다.
아이리버, 옙, 에이트리...그 안엔 항상
학창 시절 내 mp3에는 무조건 이수영의 노래가 있었다. 탁월한 가창력의 명품 보컬리스트인 그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한에 서린 듯한, 마치 창을 하는 듯한 특별한 개성이 있다. 십여 년 인생에 한을 알면 얼마나 알았을까, 이상하게 이수영의 노래를 들으면 먹먹하고 뭉클해지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당시에는 묵직한 무게감의 ‘소울풀’(Soulful)한 알앤비 음악이 많았지만 가녀린 듯하지만 힘 있는 이수영의 스타일은 단연 독보적이었다. 워낙 특별한 그의 개성은 예능 프로그램에서 뭇 연예인들의 모창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나도 집에서 ‘휠릴리’를 종종 따라 불렀다. ‘흐얼마나 후울어야 흐아나요~’ 하는 간드러진 벤딩을 어찌나 따라 하고 싶던지.
이수영은 올 초 JTBC 예능 <슈가맨 3>에 출연했다. ‘원 히트 온리’(한 개의 히트곡을 남긴 가수)라는 캐치 프레이즈로 잊힌 가수를 찾는 콘셉트의 예능에 ‘우리 수영 언니’가 나온다는 소식이 의아했지만(이수영의 히트곡은 셀 수 없다), 그의 노래를 다시 들을 수 있다는 것은 기뻤다.
그리고 최근, 명곡 중 하나인 ‘덩그러니’가 2020년 버전으로 뮤직비디오가 나왔다. 심지어 SM엔터테인먼트에서! (원래 ‘덩그러니’ 뮤직비디오에는 공효진, 조윤희, 고수가 출연한다는 사실!) 그때 그 목소리 그대로 파란 머리를 하고 돌아온 우리 언니, 다시 가요계에 파란을 일으켜 주세요!
살아본 적 없는 시절, 왜 그리울까?
박소희 작가의 만화 ‘궁’은 ‘현대 대한민국이 입헌군주제라면?’이라는 상상력에서 시작한 만화이다. 현대식으로 재해석된 한복, 궁궐 등의 작화가 순정만화에 걸맞게 참 예뻤고 그 인기는 동명의 드라마 제작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때 난 초등학생이었는데 당시 문방구 학용품 트렌드는 온통 ‘궁’이었다. 무료 웹툰도 없고, 만화방에서 순서를 기다려 만화를 빌려보던 시절이었던 것을 떠올리면 가히 신드롬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내가 살던 시절도 아니지만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를 보며 묘한 향수를 느끼는 것처럼 기와집, 한복의 곡선을 보면 이상한 편안함이 온다. 아주 꼬마 시절에 명절에나 한두 번 입던 것 말고는 한복은 거의 입어본 적이 없고, 기와집은 살아본 적도 없는데 신기한 일이다.
2015년 네이버 웹툰 루키 단편선 중 조현아 작가의 ‘섣달 그믐’이라는 작품이 있다. 만화는 2015년의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주인공이 함경도 시험장에서 수능을 보고 나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커다란 기와 밑에 대문짝만 하게 수능 시험장 문구가 적혀있고, 삼삼오오 빠져나오는 학생들은 현대식 교복을 입고 있다. 첫 장면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섣달 그믐’은 한반도 전체가 자유롭게 왕래가 되고, 전통 양식이 상당히 유지되는 현대를 상상해서 만든 작품이다. 차를 타고 기와집 사이를 달리고, 한복식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오며, 음력 12월 31일을 뜻하는 순 우리말 제목 ‘섣달 그믐’이 뒤섞이며 나는 이상한 ‘그리움’ 같은 감정을 느꼈다. 경험한 적도 없고, 일어난 적도 없는 일이 그립다니. 이런 기묘함 때문일까, 처음 5년 전에 이 작품을 봤을 때 가슴이 두근거려 몇 번이고 다시 봤던 기억이 있다. 구태의연하지만, 나의 얼이 ‘넌 한국인이다’라고 말하는 걸까.
국힙에 스며들다
내 플레이리스트에는 트로트부터 클래식까지 다양한 800여 곡의 노래가 들어있다. 국가나 장르를 딱히 가리지는 않는 편이지만 힙합은 손이 가지 않았다. 내심 힙합에 편견이 있었다는 걸 인정한다.
‘슈퍼스타 K 2’에 출연한 듀엣 투개월의 김예림을 기억하는가. 난 그 목소리에 푹 빠져 경연곡으로 불렀던 테테의 ‘Romantico’, 더클래식의 ‘여우야’를 정말 질리도록 들었다. 가수 데뷔를 하고 나서도 노래를 찾아들었는데 언젠가부터는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어느 날 유튜브를 유랑하다 보니 이름도, 음악 장르도 바꿔 다시 돌아왔더라. 댄스나 발라드를 주로 부르던 김예림은 림킴이라는 이름으로 어딘가 난해한 힙합 싱글 ‘SAL-KI’로 전혀 다른 모습을 공개했다.
뒤이어 림킴은 2019년 10월 5일 ‘GENERASIAN’이라는 앨범을 발매했다. 그야말로 동양인(Asian)의 시대(Generation)를 마치 선전 포고하는 수록곡이 담겨있다. 타이틀 ‘YELLOW’와 ‘MONG’은 서구권이 동양인 여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에 대해 고급진(?) 비웃음을 날린다. ‘We yellow’(우리는 옐로야) ‘I’m the Queen from the east’(난 동양에서 온 여왕) ‘Queen of east and the west’(동서양의 여왕)이라며 동양인 비하 표현인 ‘Yellow’를 정면으로 받아들이면서 단어의 모욕감을 무력하게 만든다.
뮤직 비디오는 더욱 직관적이다. 전형적인 동양인 클리셰로 범벅이 된 두 곡의 뮤직비디오는 어색함을 넘어 괴기스럽다. 한중일 삼국을 같은 문화로 인식하고 소비하는 것에 대해 아는 사람만 알아차릴 수 있는 고도의 먹이기(?)다. 이례적으로 영어 댓글보다 한글 댓글을 다수 상위에서 볼 수 있는 걸 보아 림킴의 뮤직비디오는 한국인에게 상당한 공감을 이끌어낸 걸로 보인다.
힙합은 미국 뉴욕 빈민가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부터 시작된 장르로 초창기 힙합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이었다. 그것이 발전한 게 지금의 랩(rap)이라고. 서양 백인 중심으로 형성된 주류 문화에 날린 림킴의 어퍼컷이야말로 진정한 힙합 정신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앨범 ‘GENERASIAN’을 텀블벅 크라우딩 펀딩으로 제작한 림킴은 2020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올해의 음악인으로 선정됐다.
사실 나는 ‘국뽕’을 좋아하지 않는다. 뭐든 과하면 탈이 나는 법이니. 자부심과 자긍심은 좋지만 지나치면 다름에 편견을 갖게 되고 개선이 필요한 점은 유야무야 덮어버리게 된다. 우리의 좋은 문화를 타국에 소개하는 것을 넘어 서구권의 인정을 받으려고 아등바등하는 모양엔 그 나름대로 자존심도 상한다.
그렇지만 왠지 벅차고, 나만 보기 아까워 소문내고 싶은 한국인만의 감성이 있다. 다들 그런 거 조금씩은 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