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별이 되다(독쟁이 시장)

춤추는 별이 되다

by 진정성의 숲


내 작은 등을 흠뻑 젖게 했던

이곳의 뜨거운 여름이 끝나갈 때쯤

우리는 또 이삿짐을 쌌다.


작은 부엌이 달린 단칸방에 살림이라고는 식기랑 냉장고 그리고 뒤쪽이 몇 군데나 뚫린 장롱이 다였다. 아는 척하지 않았던 민석이 녀석도 이삿날에는 나와 우리가 떠나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봤다. 몇 달이었지만 자칭 삼총사로 불렸던 철호와 형석이는 용달차가 떠나는 순간 닭똥 같은 눈물을 떨어뜨렸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용달차 앞자리 좁은 보조석에는 내가 앉았고 오른쪽 자리에는 엄마가 무릎에 은수를 안고 탔다. 주인집 아줌마와 같은 집에 살던 사람 몇 명이 나왔지만 엄마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몸을 돌려 뒤로 난 창으로 멀어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속으로 말했다.


'모두! 안녕!'


"은성아! 이제 내려야지?"


희미하게 들리는 엄마의 목소리에 눈을 간신히 떴다. 잠이 깨면서 볼에 축축함이 느껴졌다. 순간 내가 흘린 침이라는 걸 알았다. 용달차 아저씨가 네 시간도 넘게 걸린다고 했지만 난 순간 이동을 한 느낌이었다. 이사할 집 앞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 누군가 나를 와락 껴안았다. 할머니였다. 나도 할머니를 꼭 껴안았다. 잠이 덜 깨서 그런지 할머니 품이 너무 따뜻하게 느껴졌다. 뽀글거리는 파마와 하늘거리는 몸빼바지를 입은 할머니를 보는 순간 뭔가 안정감이 느껴졌다. 할머니는 나와 은수를 잠깐 안아주고는 엄마와 용달차 아저씨와 함께 차에 실린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살짝 경사가 있는 도로 밑으로 계단이 있었고 그 아래로 대문 서너 개가 보였다. 그중에 까만색 대문으로 짐이 들어갔다. 그곳이 이제부터 우리 집인가 보다. 엄마가 은수랑 같이 먼저 들어가 있으라고 했지만 나는 용달차 아저씨 쪽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아저씨는 나를 잠시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차에 실려 있었던 작은 냄비 하나를 손에 쥐여 주었다. 내 옆으로 은수한테도 파란색 플라스틱 바가지를 들여 주었다.


"은성, 은수! 계단 조심하고!"


엄마의 말이 들렸지만 나와 은수는 계단을 뛰어서 내려갔다. 짐을 옮기는 엄마와 할머니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마저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엄마는 내가 용달차에서 잠들기 전에 나에게 말했다. 할머니가 사는 곳 근처로 이사 갈 거라고. 그렇게 말하는 엄마의 표정은 어두웠다.


나와 은수는 신이 나서 뛰어다녔다.

이삿날은 짜장면을 먹을 수 있는 일 년에 몇 안 되는 날이었다.


"엄마, 근데 아빠는 언제 와?"


"음... 좀 있으면 올 거야..."


아빠를 못 본 지 1년은 된 것 같았다. 할머니한테는 아빠 얘기를 물어보지 않았다. 전에 할머니가 아빠를 보고 엄청 욕을 했던 장면이 아직 잊히지 않았다. 왠지 할머니한테 아빠에 대해 물으면 나한테도 무섭게 화를 낼 것만 같았다. 그리고 어차피 난 이미 알고 있었다. 언제 올지는 몰랐지만 최소한 왜 안 오는지는 알고 있었다.


아빠는 바람쟁이였으니깐.


할머니는 우리 집 앞 도로에서 포장마차를 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난 매일 할머니 포장마차를 들렸다. 엄마가 학교 끝나고 오면 꼭 할머니한테 인사하고 집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주황색 비닐로 된 천 같은 문을 젖히면 나무로 된 긴 의자가 보였고 그 위로 긴 테이블이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큰 지렁이같이 생긴 곰장어와 해산물이 놓여 있는 공간과 옆으로는 번데기와 고동을 끓이는 큰 솥이 있었다. 할머니는 내가 큰소리로 인사하면 신문지로 만든 고깔 봉투에 고동을 밑에 깔고 그 위로 번데기를 올려 줬다. 난 받자마자 포장마차 밖으로 나와 바로 다 먹었다. 보통 은수가 있는 집에 가서 같이 먹었겠지만 여기 와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은수는 이제 밖에서 잠긴 방에서 혼자 있지 않아도 됐다. 할머니가 집 앞에서 포장마차를 하고 있으니 엄마가 일을 나가도 안심을 할 수 있었다.


은수는 자유를 얻었다.


집 근처에는 독쟁이 고개라는 언덕에 있는 시장이 있었다. 오르막길 양옆으로 과일과 생선 그리고 온갖 가게들이 있었다. 이 동네에 한 깨뿐인 시장인 만큼 저녁 시간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엄마 손을 잡고 처음 이 시장에 온 날에 내 눈은 오로지 노란색 과일에 고정되어 있었다. 보통 과일은 과일가게 앞에 놓인 평상 위 바구니에 담겨 있다. 그런데 이 과일만은 달랐다. 가게 천장 쪽에 끈으로 묶어져 걸려 있었다. 그리고 과일 박스를 잘라서 만든 종이 위로 그 과일에 이름이 쓰여있었다.


'바나나'


"엄마! 나 저거 먹고 싶어!"


"응. 그래 엄마가 나중에 꼭 저거 사줄게!"


웬만해서는 엄마한테 뭘 사달라고 한 적이 없었는데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얼마 전 전학 온 학교에 반장이었던 민철이가 바나나 한 개를 가지고 와 자랑을 했었다. 민철이는 먹고 싶은 사람은 자기 앞으로 줄을 서라고 했다. 난 그런 민철이가 재수가 없어서 줄을 서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애들은 달랐다. 미친 듯이 줄은 늘어났고 순서대로 아주 콩알만큼 나눠주며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유세를 떠는 민철이가 싫었지만 사실 나도 미친 듯이 먹고 싶었다.


엄마는 독쟁이 시장으로 출근을 했다.

이제 엄마는 화장을 하지 않았고 시장으로 출근을 했다.


화장을 한 엄마가 이뻐서 좋았지만

이젠 화장을 하지 않는 엄마가 더 좋았다.


이사 오고 며칠 후 엄마는 작은 리어카를 하나 샀다. 그리고 위로 얇은 판때기를 데고 물건을 올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그 공간에는 펜치나 니퍼 같은 공구들과 귀이개같이 잡다한 생필품이 올려졌다. 보통은 아저씨들이 이런 물건들을 팔았는데 엄마가 팔게 된 사연은 있었다. 시장에는 암묵적으로 자기 자리라는 게 있었다. 시장 양옆으로 건물에 안에서 장사하는 가게들은 상관없었지만 길바닥에 물건을 놓고 파는 사람들에게는 이 자기 자리가 중요했다. 할머니와 친한 사람이 얼마 전까지 장사를 했는데 갑자기 죽을 병에 걸려서 자리가 비었다는 거다. 얼마의 자릿값을 할머니가 대 주었고 그 아저씨가 했던 장사를 그대로 이어서 엄마가 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학교가 끝나면 난 무조건 엄마가 있는 독쟁이 시장으로 갔다. 엄마 옆자리에는 산에서 나물을 캐와서 파는 할머니가 있었다. 난 할머니를 좋아했다. 나만 보면 허리춤 깊은 곳에서 알사탕을 꺼내서 주셨는데 포장 비닐은 구겨져 있어도 정말 달고 맛있었다. 그렇게 난 시장 가는 걸 좋아했다.


"골라! 골라! 아저씨! 물건 한번 보세요! 좋아요!"


난 넉살이 좋았다. 엄마의 리어카 앞에서 과일 가게 아저씨가 소리치는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시장에서 여자가 공구를 파는 것도 신기해했는데 어린애가 옆에서 호객행위까지 하니 보는 사람들마다 웃었다. 엄마는 시장에 오지 말고 집에 가서 숙제나 하라고 했지만, 난 은수까지 교육시켜서 함께 소리쳤다.


"골라! 골라! 없는 거 빼고 다 팔아요!"


우린 독쟁이 시장에 스타였다.


-진정성의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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