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222
상주가 된다는 건 무엇인가.
력사 장례식 때 나는 언감생심 상주는 꿈도 못 꿨다. 아니, 꿈만 꿨다. 상복을 같이 입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얼마 후, 다른 친구의 장례식에 가게 되었는데, 그때는 그 친구의 파트너가 상주를 하고 있었다. 그, 장례식 전광판에 친구의 이름이 상주로 들어가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참 기분이 묘했다. 이 아프고 아픈 순간임에도, 우리가 한 발짝 더 나아갔구나.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고.
이후, 력사 장례식에 왔던 친구들과 하나 둘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들이 공통적으로 해준 말은 “캔디가 상주였지”라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기능적으로는 또 그렇기도 했다. 장례의 모든 것을 내가 결정했고, 혈연 가족들은 내 의견을 (력사 생전의 의견이라 판단하고) 따라주었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은 수목장지 정도? 하지만 결국 그것도 어머니가 가고 싶어 하던 곳에 위치나 금액은 논의하여 결정한 셈이다.
올해 내내 장례식을 끊임없이 다니면서, 장례방식의 선택, 상주의 위치 등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계속 나온 이야기는 ‘선례가 있는 게 중요하다’, ‘앞선 경험을 통해 더 다양한 방향을 상상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나도 수년 전의 경험을 나누어준 이가 있었기에, 어떤 부분은 마음을 더 단단히 먹을 수 있었다.
기홍 장례식을 겪으며 수의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력사 장례식을 겪으며 사람들은 장례지도사와 잘 이야기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었다. 력사는 평생 입지 않았던 치마 대신 남자 수의를 입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친구는 수의가 아닌, 정장을 입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친구 위패에는 성도나, 어쩌고 저쩌고 어려운 말이 아닌 (활동명)(본명)이 쓰여있었다. 새삼 왈칵 눈물이 나는 순간이었다. 저 이름만큼 저 친구를 분명하게 설명해줄 다른 단어는 세상에 없으니까.
사회는 변했고, 상황에 따라 이젠 시도할 수 있는 것들이 생겼다. 장례식 음식을 비건으로, 생전 좋아하던 음악으로, 수의
대신 좋아하던 옷으로. 그이가 생전 원하던 그것으로. 상주도 내가 원하는 그 사람이. 영정사진을 드는 것도, 관을 드는 것도 성별이나 그런 게 아니라 가까운 누군가가, 그이를 아끼던 누군가가 함께 들면 된다.
그러니 이젠 다른 무엇이든을 또 누군가 시도하고, 진행하고 무엇보다 이 기사처럼 공유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내가 ‘실질적’ 상주였지만, 그래, 난 저런 수식어 하나도 없이 ‘그냥, 당연히’ 상주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는 걸 알겠다. 포기했던 꿈이고, 실질적 상주라 다행이다 생각했지만,
인정한다. 나는 ‘당연히 아무 고민도 생각도 없이’ 상주이고 싶었다.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당연’하고 싶었다.
하지만 력사의 ‘마지막’이 평온하길 바랬고, 어떤 분란도 없길 바랬고, 어차피 안될 거라 생각해서 ‘만족했다’
가끔 생각해보긴 한다
‘만약 력사가 유언장을 썼더라면?’
‘력사가 마지막 순간에 커밍아웃을 했다면?’
혹은 내가 사망 혹은 장례의 순간에 커밍아웃을 하고 배우자의 권리를 주장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정말…. 어떻게 됐을까?
* 한겨레에 올라온 기사 "언니 장례식의 상주가 되기 위해 "여자가 아니다"라고 했다를 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