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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나 Jul 29. 2020

사물 쓰기, 11. 명함

사회인의 한 뼘짜리 발악

명함처럼 중요하고도 처치 곤란한 물건이 있을까?


디지털화가 대세고, 이메일 서명이 보편화된 시대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명함 예절을 가르치고 있는 이 세상에서. 온라인에 글을 써도 종이 명함은 파두어야 한다. 그래야 한 군데라도 더 비벼볼 수가 있더라. 연락처는 받고 싶지만 저장하면 카톡 친추가 되어버리는 세상이라 더 명함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딱 명함 한 장만큼의 관계를 위해.


어쩌면 생존수단

어린 시절부터 간지 나는 명함이 가지고 싶었다. 더 명확하게 말해보자면, 명함 한 장으로 더 이상 나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지위가 갖고 싶었다. 사람들이 명함을 받아가고 싶어 하는 위치가 되고 싶었다. 그런 욕심으로 닮고 싶은 사람들의 명함을 하나씩 모으고 이들을 내 인맥으로 삼으려고 노력했다. 전공도 경력도 없이 내가 어린 시절부터 단 한 번도 해보려고 하지 않은 새로운 분야에서 일해보고 싶었기에 내 의도는 더 확고했다. 학교의 울타리에 더 이상 보호받지 못하는 나에게 '업계 사람'은 하나라도 더 알아둬야 하는 자산이었다. 난 살려고 명함을 모았다.

그 점에서 3년 전에 다녔던 내 첫 회사는 내가 '도약하기(또는 도망치기)'에 좋은 업무를 내게 주었다. 관련 업계의 온갖 인사담당자들과 연락처를 주고받고 그 사람들의 의견을 청취해야 했다. 일이라고는 동갑내기 친구들과 해본 봉사나 동아리가 전부이던 나였다. 그리고 이 일은 인턴 나부랭이가 하기엔 정말이지, 과중하고도 힘든 일이었다. 아마 내가 찾아간  수십 개의 회사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날 보며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제가 진심인 줄은 모르셨죠

지인들에게 언젠가 이야기했었지만, 어느 날은 모 리서치사의 인사부장(여자분이었다)이 나를 앉혀두고 일은 괜찮냐, 인턴인데 혼자서 이런 일 하고 다니기 힘들지 않으냐고 묻더라. 그때까지는 내가 힘들게 일한다는 생각도 못 했는데 그 질문을 듣고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내 능력이 부족해서 못난 위치에서 고생하는 것 같았다. (물론 그게 맞았고 지금 돌이켜봐도 말도 안 되는 짓거리임)

차마 그런 말은 꺼낼 수 없어서, 힘들긴 한데 관심 있는 회사에 이렇게 정식으로 오갈 수 있으니 괜찮다고 했다. 그 생각만은 진심이었으니까.

그분은 생판 처음 본 나에게 무슨 일이든 잘할 거다, 힘들어도 버티면 반드시 기회가 온다고 말했다. 그분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내게 그런 말을 한 건지? 생각할수록 아리송하고 괜히 찡하다. 난 그 말 한마디를 굳게 새기고 일을 하며 재취업을 준비했다. 그렇게 지금 회사에 다니게 되었다. 명함 하나 얻어서 이 쪽에 아는 사람 하나라도 만들어두자 생각하고 찾아든 영악한 나에게 그 부장님은, 아마도 지금의 나에게 가장 고마운 사람일 거다.


나의 첫 명함 케이스. 결국 부족해져서 하나 더 샀다.


그 후로도 기회가 생기면 명함을 얻었다. 학교 다닐 때에도 손 들고 나서서 질문을 잘하지는 못했던 나지만, 컨퍼런스에 참석하게 되면 명함 하나만큼은 받아오자는 생각을 하며 나선다. 그렇게 내가 남몰래 흠모하던 누군가의 명함을 받아오게 됐다. 난 그 분과 딱 명함만큼의 사이다. 그분에게 나는 호기심 많은 젊은 사람이겠지만 나는 그분의 명함을, 그것도 업무용 명함을 받아왔다는 게 그렇게 기쁘더라. 내가 멋지다고 생각한 사람이 나를 비즈니스적 관계로 생각하다니! 트위터에서도 모른 척 리트윗 하면서 변태처럼 기뻐하고 있다. 당신의 명함을 받아 얼마나 기쁜지요. 단지 명함을 받고 짧은 대화를 했을 뿐이지만 '주고받았으니까' 언젠가 인연이 닿으면 또 만날 수 있겠지. 그리고 갑작스레 깊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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