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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길 참 잘했다

어느 날 걸려온 뜻밖의 전화

by 달보


한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070'으로 시작하는 번호는 아니었다. 저장되지 않은 휴대폰 번호였다. 긴장됐다. 혹시 출판사에서 내 글을 보고 출간 계약을 제안하려고 전화를 건 걸까 싶은 꿈을 잠시 꾸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작가님."


작가님?

이 짧은 순간에 얼마나 설렜는지.


"저 A에요."

"예?"


알고 보니 나의 첫 책, <신혼이지만 각방을 씁니다>의 독서모임에서 만난 분이었다. 기억력이 좋은 편이 아닌데도 그분은 또렷이 떠올랐다. 모두 실명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유일하게 닉네임을 사용했던 분. 그리고 마치 어머니처럼 따뜻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봐서인지, 유독 기억에 남아 있었다. 우연히 집으로 향하는 길에 잠시 함께 걷기도 했었고, 그 장면이 마치 영화처럼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인간관계가 좁고 평소 사람을 잘 만나지 않다 보니, 뜻밖의 전화에 적잖이 당황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왜 전화했을까. 내색하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떨리는 내 목소리를 듣고 상황 파악이 된 듯한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전화를 해 본 거라고 했다. 그런데 난 그게 왜 그렇게 특별한 이유처럼 다가왔을까.


책을 출간하면서 명함을 만들었다. '책 한 권 낸다고 인생이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많이 들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하지만 명함은 왠지 필요할 것 같아 단순한 디자인으로 주문해서 갖고 있었다. 독서모임에서 나눠줬던 그 명함에 적힌 번호로 그분이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가슴 깊이 오묘한 충족감이 피어올랐다. 사람들과 대화하는 걸 어려워하는 편이 아닌데, 유독 긴장되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분이 "요즘 뭐 하고 지내세요?"라고 묻길래, "여전히 글을 쓰고 있어요."라고 답했다. 그러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책 한 권 더 내서 다시 얼굴 봤으면 좋겠어요."

"잘할 수 있고, 잘 될 거예요."

(이것보다 힘이 되는 말씀을 더 많이 해주셨는데, 녹음하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말이 있었다.

"평소 작가님 생각을 자주 해요."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내 생각을 자주 하신다니. 책 때문일까 싶었지만, 그분은 이미 결혼한 지 오래되었고 손주까지 있는 분이었다. 그러니 결혼 생활이 주된 책의 내용이 직접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 같지는 않았다.


이유를 들어보니, 그분은 독서모임이나 북토크에서 이미 저명한 작가들만 접해왔는데, 이제 막 첫 책을 나 같은 작가는 처음이어서 기억에 남았다고 했다. 그게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게 신선했다. 나라면 그런 이유로 처음 본 작가를 기억할 수 있을까. 보통은 반대의 이유로 기억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은 아직 얼마나 좁은 건지.


사실 나는 전화 통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첫 직장에서 하루에도 수백 통의 전화를 받으며 일했던 탓에, 이후로 전화 자체를 기피하게 되었다. 벨소리가 울릴 때마다 미세한 스트레스가 쌓였다. 그런데도 그분과의 통화는 짧지만 진한 여운을 남겼다. 무엇보다도, 내게 연락을 주신 용기와 따뜻한 마음이 담긴 응원이 너무나 고마웠다.


육아 중에 글을 쓰는 게 쉽지 않아 점점 지쳐가고 있던 터였다. 그런 와중에 그분과의 통화는 마치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처럼 내 안에 따스한 기운을 스며들게 했다.


글쓰기는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다. 작가가 되고 싶은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일에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도 아무런 지장이 없는 삶을 살고 싶어서다. 그러나 A님과의 통화가 끝난 후, 그런 복잡한 이유 따위는 뒤로 하고 단순히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글 쓰길 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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