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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일도 없는 오늘이 빛나는 이유

글쓰기로 점철된 삶을 음미하며

by 달보


오랜 시간이 지나도 따뜻함을 유지해주는 텀블러를 두고, 굳이 머그컵에 뜨거운 물을 부어 원두를 녹인다. 족히 두 시간쯤은 책상 위에서 나와 함께 있을 예정이지만, 머그컵 속 커피는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금세 식겠지. 그럼에도 머그컵을 고집한다. 그래야 비로소 커피를 마시는 기분이 들고, 그래야 온전한 여유로움을 만끽하는 것 같으니까.


쓸거리를 잔뜩 모아놓고도, 아까 쓰던 글이 있음에도, 굳이 메모장을 열어 새로운 글을 쓴다. 특별한 주제도, 하고 싶은 말도 없이 그저 주저리주저리 키보드를 두드린다.


내 노트북은 키감이 좋다. 촐랑거리는 타닥타닥이 아니라 얌전하고 부드러운 두득두득 소리가 난다. 마치 백색소음만 같은. 한때는 노트북만 있으면 다른 키보드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노트북만 쓰다 보니 목이 아파 거치대를 샀고, 거치대 위에 올려두니 무선 키보드가 필요해졌다. 그렇게 별도의 키보드로 글을 쓰다 보니, 역시 클래식한 키보드만 한 게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아직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커피 향이 코를 간질이고, 안방에서 8개월 된 아이를 재우는 아내의 조용한 속삭임이 귀에 잔잔한 파도를 일으킨다. 감성 짙은 전구색 조명이 비추는 8인용 넓은 식탁 위에는 노트북이 어수선하게 펼쳐져 있다. 지금 이 순간, 더없이 평온하다.


노트북을 설치한 곳은 늘 지저분해 보인다. 충전선 때문이다. 오래된 노트북이라 충전하지 않으면 한 시간 반도 버티지 못한다. 배터리 수명을 위해 80% 이상 충전되지 않게 설정한 것도 영향을 미친다. 어디든 일터 주변이 난잡한 걸 못 참는 성격이지만, 글을 쓰고 싶을 때는 그 정도의 불편함쯤은 금세 잊는다.


언제나 독자들에게 전할 만한 내용이 있어야 글을 쓰려고 했다. 빛나는 아이디어까지는 아니더라도, 약간의 영감 정도는 떠올라야 노트북 앞에 앉았다. 그런데 오늘처럼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쓰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글을 쓰지 않은 하루는 머릿속을 스쳐가는 무의미한 순간으로 남겠지. 물론 글을 쓴다고 해서 하루가 특별해지는 마법이 일어나는 건 아니지만, 내가 그렇게 생각하면 그만 아닌가 싶다.


난 그저 쓰고, 쓰고, 또 쓸 뿐이다.

(후루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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