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는 오후였다. 우산을 쓰지 않은 채 거리를 걷는 브리즈번 사람들의 모습은 여전히 낯설었다. 담배를 물고 유모차를 끄는 애엄마보다, 옷이 젖든 말든 묵묵히 제 갈 길 가는 사람들이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더 걸렸다. 하지만 나도 이내 그들과 닮아갔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도 드문 데다 상가들의 차양막으로도 충분히 비를 피할 수 있었다.
정작 우산이 필요한 곳은 따로 있었다. 양생되지 않은 콘크리트 위로 소낙비가 쏟아져 하릴없이 으스러져가는 빌딩만 같던 내 영혼이었다.
딱히 재주도 없이 나이만 먹고 있던 내가 브리즈번행을 결심한 건, 결혼 적령기에 대기업을 박차고 나와 호주로 떠난 사촌형의 행보 덕분이었다. 군대에서 영어 공부를 시작하고 제대 후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비행기 티켓을 샀다. 모든 게 계획대로였으나 한 가지 변수가 있다면 그 사이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것이었다.
1월 1일 첫눈 내리는 날, 알바 매니저였던 그녀와 난 동성로의 버스 정류장에서 나란히 서 있었다. 절묘한 타이밍에 내리는 첫눈의 낭만을 만끽하는 것도 잠시, 평소엔 오매불망 기다려도 좀처럼 오지 않던 버스가 그날따라 일찍이 눈에 띄었다. 순간 형언할 수 없는 어떤 마법 같은 힘이 내 안에 서린 보잘 것 없는 용기를 북돋웠다. 버스를 타기 전만 해도 평행선상을 달리던 두 세계관이 겹치기 시작했다는 걸, 버스 안에서 내 손을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보며 실감했다. 우리 사이는 더할 나위 없었다.
그러나 우리의 관계는 늦가을의 낙엽마냥 바스러져갔다. 호주에 간 후로 평소에 잘 보내지도 않던 셀카를 첨부하면서까지 매일의 근황을 공유하던 그녀가, 언제 그랬냐는 듯 연락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한 시간에 몇 번도 오던 카톡이 어느 순간부터는 반나절에 한 번씩 오더니, 결국 하루에 한 번 올까 말까한 수준으로 전락했다. 상황이 그 지경이 될 때까지도 나는 그녀를 닦달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어느 날 그녀로부터 이런 메시지가 도착했기 때문이다.
요즘 연락을 자주 못하는 건 일이 바빠져서 그런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사랑한다고.
그러나 그건 '우리 사이는 여전히 견고하다는 증명서'가 아니라, '관계의 종말을 암시하는 예고장'이었다. 그녀와 교집합을 이루던 것들이 해체되는 데서 비롯한 상실감은 생(生)과 얽힌 모든 의욕을 앗아갔다. 오색찬란했던 세상은 점차 잿빛으로 변해갔다.
와중에 생계가 걸린 아르바이트는 꾸역꾸역 해냈다. 하지만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 무렵 퇴근하면 영혼 잃은 자의 본색을 드러내며 정처 없이 거리를 떠돌았다. 인적 드문 곳에 외로운 벤치를 발견하면 가만히 앉아 하염없이 울었다. 밤하늘에 달이 뜨면 그녀의 마음을 돌려달라며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습게도 그녀는 나의 첫사랑이 되었다.
어쩌다 그녀의 마음이 변한 건지는 아직도 모른다. 우리가 헤어지던 날 화장도 하지 않고 모자만 푹 눌러쓴 채 나타난 그녀는 끝끝내 진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호주에 있는 동안 다른 남자를 만났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아마도 원인은 내게 있었다. 그때의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내 모든 것을 이해해주겠지'라는 순진한 믿음에 깊이 잠겨 있었다.
브리즈번 생활에 적응될 때쯤 우연히 고향 선배를 만났다. 한국에서도 보기 힘든 그를 머나먼 타국에서 마주쳤으니 반가움에 몸서리쳤다. 그는 딸기농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햇빛에 그을려 꾀죄죄해보이긴 했지만 얼굴에 '잘 지냄'이 쓰여 있었다. 농장 생활이 궁금해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홧김에 그를 따라가기로 결정했다. 안 그래도 삐까뻔쩍한 빌딩 사이를 누비는 일상이 지루하던 참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에게 말로만 듣던 일상을 몸소 겪어보니 상상하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일적으로는 괜찮았다. 문제는 숙소에서 함께 지내는 사람들이었다. 고향 선배를 포함해 숙소 사람들은 마약과 도박에 점철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뙤약볕 아래서 기계처럼 일하는 딸기밭보다, 지친 몸을 뉘이고 회복해야 할 보금자리에서 버티는 일이 오히려 더 힘들었다. 차 한 대 없이 한적한 시골에 머무르던 나는 마트조차 마음대로 갈 수 없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창자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우울감을 그녀에게 모조리 토해냈다. 진급 시기가 맞물려 그 어느 때보다도 바빴을 그녀를 배려하기는커녕 내 안위를 챙기는 데 여념이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충을 털어놓는 건 당연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 믿음이 그녀를 질리게 했다는 사실은 훗날 내가 똑같은 투정을 받아보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다.
첫사랑을 잃은 트라우마로 인해 난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통을 나누는 법을 상실했다. 좋은 면만 내보이려 하고 마음 깊은 통증은 차마 드러내지 못하고 끙끙 앓곤 했다. 직장생활, 육아, 글쓰기로 인한 고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옥죄어 오는 버거움을 아내에게 온전히 털어놓지 못하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그렇다고 감정을 제대로 숨기지도 못한다. 내 안의 뿔을 감추고 싶은 게 본심이 아닌 건지, 은근히 아내가 나의 고충을 알아주길 바라는 모순을 심심찮게 마주한다. 적지 않은 사랑과 이별의 순환을 거듭하며 가장 정제된 상태가 바로 지금의 나인 줄 알았건만, 어쩌면 나는 예전으로부터 단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미숙한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나는 말할 타이밍을 놓치고 마음의 고비를 넘기는 데 익숙하지 않다. 아내의 표정에서 섬세한 단서를 읽고도 애써 외면하고, 나를 지켜보는 눈빛에서 걱정을 읽고도 '괜찮아'라는 말로 밀어낸다. 그게 어른스러운 태도라 착각하며 감정의 무게를 애써 혼자 견디려 한다. 그건 감내라기보다는 외면에 가까웠다.
나는 과거의 상처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온전히 마음을 여는 게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과연 내가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래도 이번에는, 이 미숙함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다시 시작해보려 한다.
CONNE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