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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글쓰기, 글쓰기

by 달보


2022년 6월 23일 새벽,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뭘 해야 할까. 일단 이를 닦고 커피를 내리며 생각해보기로 했다. 물이 끓는 동안 환한 달빛을 멍하니 바라봤다. 읽던 책이나 읽어야 하나. 슬며시 고개를 들추는 잡념을 집어삼키며 노트북이 놓인 식탁에 앉았다. 블로그를 개설하고 새벽 기상을 기록하기로 했다. 타임스탬프로 찍은 인증샷 아래 날짜와 일어난 시간을 적고 말 심산이었다. 그런데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나는 글을 쓰고 있었다. 유독 환하게 빛나는 달이 나를 조종이라도 하는 것처럼 예정에 없던 이야기를 구구절절 적고 있었다. 한 줄로 그칠 것 같았던 글은 어느새 500자를 넘기고 있었다.


'별 일이 다 있네.'라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한참 연애할 때 연애편지를 수두룩하게 써왔으니, 그 정도는 우연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다음날도, 그다음날도 나는 계속해서 글을 썼다. 새벽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커피포트에 물이 끓는 동안 거실창으로 쏟아지는 달빛을 가만히 응시하다 보면 떠오르는 생각들을 그대로 노트북 화면으로 옮겼다. 어느 순간부터는 오기가 생겨서 언제까지 써지나 한 번 보자는 심정으로 스스로를 지켜봤다.


나의 글쓰기는 그렇게 내 삶에 스며들었다. 그날부터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썼더니 어느새 브런치 작가가 되었고, 출판사로부터 출간 제안도 받아보고, 내 이름으로 된 책을 출간해보기까지 했다. 어느덧 글쓰기는 인생의 과업쯤으로 여기기 시작했고,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글을 쓰기로 다짐했다.




글쓰기는 쉽지만 어려웠고, 복잡하면서도 단순했다. 키보드 위에 손가락을 올리기만 하면 몇 천자쯤은 가볍게 써내려갔다. 글쓰기에 재미가 붙다 보니 일상에서 글감을 채굴하는 건 자연스럽게 버릇이 들었다. 어쩌다 글이 써지지 않으면 '글이 써지지 않는다'는 제목의 글을 썼고, 내 글이 잘 쓴 글인지 아닌지는 개의치도 않고 쓰는 족족 세상에 내비쳤다.


글도 쓰다 보면 겪어야 할 과정이 알아서 나타나는지 첫 번째 글태기가 찾아왔다. 자신 있게 쓰던 글들이 정작 내 안에서 우러나온 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동안 쓴 글들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보면 볼수록 내 생각이 아니라, 이전에 읽은 책에서 봤던 문장들을 내 생각이라 착각하며 쓴 것만 같았다. 대체로 솔직하지 못했고, 추상적이었으며,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뉘앙스가 곳곳에 서려 있었다.


나는 내 이야기를 쓰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세상에 '좋은 글' 같은 건 애초에 없기도 하고, 그런 게 성립되는 건 글쓴이와 독자의 콜라보로 이루어지는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솔직하게 쓰는 게 매력인 줄 알았지만, 솔직하지 못했을 뿐더러 비겁하기까지 했다. 쥐뿔도 없으면서 아는 척, 잘난 척하느라 갖은 애를 썼다.


적잖은 충격을 받았지만 다행히 글쓰기를 그만두진 않았고, 진짜 솔직한 글을 쓰기 위해 스스로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자기계발서나 인문교양서가 아닌 솔직담백한 에세이를 찾아 읽어봤다. 대단해 보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야장천 읽다가, 별 거 없어 보이지만 실은 누구보다도 위대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하다 보니, 보잘것 없는 내 일상 속에서도 얼마든지 발췌할 만한 스토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번째, 세 번째 글태기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마치 내게 필요한 가르침을 주러 때에 맞춰 찾아오는 요정처럼. 내 글이 재수없어 보이는 것도, 불친절하다는 것도, 필요한 설명은 건너뛰는 것도, 모두 글태기가 나를 한 번 휩쓸고 지나간 후에야 알게 된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다름 아닌 아내였다. 글태기를 극복하게 만들어준 게 아니라, 글태기라는 고된 절차를 나에게 정확히 각인시킨 건 바로 그녀였다. 나를 과대포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문제점과 장점을 뼈에 사무치도록 솔직하게 전해준 덕분이다.




한편 <우리는 글쓰기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라는 책제목처럼, 사람들은 글쓰기를 정말 심각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짙은 것 같다. 글을 쓰면서 글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만나보니 대부분 글쓰기를 어려워했고, 자신의 능력으론 해낼 수 없는 어려운 과제를 대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글쓰기가 쉬운 건 아니지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만만한 것이라고는 생각한다. 글쓰기라는 행위 자체가 머릿속에 빙글빙글 떠도는 것들을 텍스트로 치환하는 작업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하지 않는 인간은 없고, 말 못하고 글 쓰지 못하는 이들은 요즘 같은 시대에 찾아보기 드물다. 그럼에도 글쓰기를 멀리하는 이유는 머릿속의 빙글빙글 도는 생각을 바깥으로 꺼내는 과정 어딘가에서 막히기 때문이라 보는데, 그 정체를 알지 못하거나 알아도 붙잡지 못하는 것이 원인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런 상황을 대변하는 말로 '자기검열', '고정관념', '선입견', '착각', '망상' 정도가 있겠고.


다만 그런 걸 알아도 글쓰기는 만만하지 않다. 어찌된 게 글은 쓰면 쓸수록 쉬워지는 게 아니라 더 어려워지는 것만 같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막 쓸 때가 그리워질만큼이나 요즘의 난 한 편의 글을 쓸 때마다 잡생각이 너무도 나서 괴로울 지경이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써낼 수 있는 건 그런 생각들을 무시하는 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내 안에 방해공작에 한 번 방심하면 걷잡을 수 없이 나를 끄잡아내린다는 것을 몇 번이고 경험했다.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방황하고, 부딪히고, 배우게 될까. 두려움이 앞서지만, 그런 기운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의 설렘이 글을 계속 쓰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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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보가 쓴 책 : 『신혼이지만 각방을 씁니다』

달보의 일상이 담긴 :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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