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와아아아악!"
저 앞에서 다섯 명쯤 되어 보이는 무리가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머나먼 타지에서 외국인들에게 맞아 죽는 건 좀 억울한데, 라는 생각이 스쳤다. 금세 코앞까지 다가온 그들은 하찮은 존재를 내려다보듯 묘하게 웃으며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유유히 지나쳐 갔다. 높은 곳에서 갑자기 추락한 듯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진이 빠져 걸을 힘도 없었지만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겠단 생각에 걸음을 재촉했다.
어학원 친구들과 공원에서 맥주 파티를 즐긴 뒤, 달빛조차 잘 닿지 않는 어두운 골목길을 걷던 중 일어난 일이었다. 마음에 싹 튼 불안감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오늘 같은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도, 그땐 이 정도로 끝난다는 보장도 없었으니까. 대낮엔 아늑하고 정겨웠던 동네가 해만 지면 이렇게 순식간에 낯설고 위협적인 분위기로 뒤바뀐다는 게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다. 안그래도 어학원을 다니느라 매일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게 피곤하던 참이었다.
알아보니 학원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쉐어하우스가 많았다. 없는 게 거의 없는 시티 근처인데도, 있는 게 거의 없는 도시 외곽의 한적한 동네보다 방값이 오히려 싸면 쌌지 더 비싼 경우는 드물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이사하고 싶었다. 하지만 호주에 정착하는 동안 많은 도움을 준 마스터형에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럼에도 결국엔 그런 정에 오래 휘둘리는 편이 아니기도 해서 약간 머뭇거리다 솔직하게 말했다. 마스터형은 씁쓸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억지 미소를 띠며 이해하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한적한 동네 어귀에 있는 쉐어하우스에서, 그것도 마스터와 방을 함께 쓰며 지낼 사람을 구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새로운 보금자리는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마스터형이 알면 미안해질 정도로 진작에 이곳으로 옮겨올 걸 그랬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어학원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놀다 들어와도 부담 없었고, 한인마트, 맥도날드, bottle shop이 전부 도보 10분 거리였다. 훗날 졸업작품을 준비하며 최대한 기억을 더듬어 참고할 만큼, 디자인적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브리즈번 스퀘어 도서관(Brisbane Square Library)도 마음만 먹으면 걸어서 갈 수 있었다. 건물 외관의 화려함만큼이나 내부 공간도 탁월했고, 입구에 들어서면 백화점을 방불케하는 커다란 에스컬레이터가 2층까지 길게 뻗어 있었다.
새 보금자리는 한국 아파트와 비슷한 구조였다. 큰 방 하나, 작은 방 두 개, 주방이 딸린 거실, 그리고 다섯 명이 모여 파티를 열어도 될 만큼 널찍한 발코니가 있었다. 화장실은 총 세 개였다. 큰 방과 작은 방에 각각 하나씩 딸려 있었고, 나머지 하나는 거실에 있었다. 문지방이 없는 게 유독 낯설었다. 커플룸으로도 쓰이는 큰 방에는 미소년처럼 생긴 형이 살았는데 마스터는 아니지만, 마스터 역할을 수행했다. 그 맞은편 방에는 여자 두 명이서 함께 지냈다. 한 명은 호주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한 명은 외국인 남자친구가 있었다. 그들의 현지인 뺨 치는 영어 실력이 그저 부러울 따름이었다. 내 침대가 있는 방은 가장 안쪽에 있는 화장실 딸린 작은 방이었고 남자 셋이 함께 썼다. 한 명은 동갑이었고, 한 명은 키 크고 체격 좋은 형이었다.
동갑내기는 살가운 성격이었다. 늘 웃고 다녔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려 애쓰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부모님에게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티가 났다. 나는 평소 동갑을 그리 선호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호주에 와서는 대부분 나이 많은 형들만 만나왔기 때문에 동갑 친구 자체가 귀했다. 다만 눈치가 지지리도 없는 타입이었다. 내가 지은 밥을 허락도 없이 나눠 먹는다든지, 내가 사온 콜라를 자연스럽게 마신다든지 하는 태도는 살짝 불편했다.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자신의 말과 행동이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감각이 형편없는 것만 빼면 나무랄 게 없는 친구였다.
쓰레기는 분리수거할 필요 없이 가득 차면 복도에 있는 구멍에 던지기만 하면 됐는데, 나는 그게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지하에는 헬스장과 수영장도 있었다. 마침 한국에서 접영까지 배우고 온 터라 종종 수영을 즐기기도 했다. 호주 현지인의 입이 떡 벌어지는 수영 실력을 직관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여하튼 비좁은 방에서 남자 셋이 함께 지내야 한다는 점만 빼면 거의 완벽했다. 이 정도 시설을 이 가격에 쓸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흠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혹시 형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아니요."
같은 방을 쓰는 형은 나와 전혀 친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니, 뭔가 적대적이었다. 방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책상을 그 형이 아무렇지 않게 독차지하고 있는 걸 보니 꽤 오래 지낸 듯했다. 딱 봐도 이 집의 실세 같았다. 말을 걸어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당신과 친해질 생각은 없으니 그냥 지나가세요'라는 글자가 얼굴에 쓰여 있는 듯했다. 간혹 눈을 마주칠 때면 예사롭지 않은 눈빛에 주눅이 들 정도였다. 첫날부터 그랬으니 답답하기 짝이 없었지만, 괜히 캐물을 수도 없는 상황이라 찜찜한 마음을 꾹 눌러 담고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
알고 보니 그 형은 나에게만 그렇게 굴었다. 다른 사람들과는 실없는 농담도 주고받고, 웃음도 잘 터뜨리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집 밖에선 그나마 덜했지만, 집에만 들어오면 그 형의 존재 자체가 신경을 날카롭게 건드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게 없는데 대체 왜 그러는 걸까. 설마 형이라고 불러도 되냐고 물은 게 기분 나빴던 걸까.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냐고, 혹시 실수한 게 있냐고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끝내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렇게 찜찜한 상태로 일주일이 흘렀다.
주말이면 대청소를 했다. 각자 맡은 구역이 있는 듯 일사분란하게 움직였고 나는 눈치껏 사람이 없는 주방을 맡았다. 팔을 걷어붙이고 걸레질을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 모든 표면을 닦았다. 밥솥 같은 전기기기는 코드부터 뽑고 옆으로 치운 뒤 평소 손이 잘 안 닿는 곳까지 꼼꼼히 훑었다. 예전에 알바할 때 냉장고 바닥까지 닦던 기억을 떠올리며 정성껏 닦았다. 싱크대까지 마무리한 다음 거실 쪽 청소를 도왔다.
청소도 일인지라 한 시간쯤 지나자 진이 빠졌고 졸음이 몰려왔다. 창문 너머로 대낮의 환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 따사로운 빛을 받으며 편히 누워 잘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포근하게 다가와 그대로 잠이 들었다. 얼마 후 눈을 떴을 땐 태양이 산등성이 너머로 천천히 사라지며 세상을 황금빛 노을로 물들이며 달에게 바통을 넘기고 있었다.
처음엔 스스로 눈을 뜬 줄 알았는데, 이내 누군가가 나를 건드려서 깨웠다는 걸 알아차리고 흠칫 놀랐다. 방 안은 불이 꺼져 있었고, 문틈 사이로 흘러든 거실 불빛이 어둠 속에 누군가의 형체를 어렴풋이 드러내고 있었다. 역광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고 실루엣만 겨우 드러나 있었다. 이윽고 눈을 비비며 자세히 들여다보니 나를 투명인간처럼 대하던 바로 그 룸메이트 형이었다.
"나와서 밥 먹어요."
"예?"
다른 사람들에게 짓던 그 온화한 미소를 내게도 짓고 있는 현실을 실감할 겨를도 없이, 그가 내 팔을 가볍게 툭툭 치며 나를 밖으로 이끌었다. 방에서 질질 끌려가듯 나가면서도 방금 들은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계속 곱씹고 있었다. 그러다 거실로 들어서는 순간, 눈앞에 믿기 어려운 장면이 펼쳐졌다. 식탁 한가운데엔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 냄비가 놓여 있었고, 모락모락 김이 나는 밥 한 그릇과 정겨운 밑반찬이 정갈하게 놓인 수저와 함께 차려져 있었다. '뭐지?' 하는 생각이 짧은 순간 머릿속을 수십 번이나 맴돌았다. 얼떨떨한 얼굴로 그 형을 바라보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아까 청소 꽤 열심히 하던데, 낮잠까지 오래 자는 거 보니까 많이 피곤했나 봐요. 간단히 차린 거예요. 얼른 먹어요."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보며 말도 제대로 섞지 않던 사람이 뜬금없이 밥을 차려줬다는 사실이 쉽게 믿기지 않았다. 꿈인가 싶었지만 주방에 퍼진 된장찌개 냄새와 김이 피어오르는 밥그릇, 따뜻한 공기까지 모든 게 너무 현실적이었다. 허기졌던 나는 말없이 수저를 들었고, 밥을 먹는 동안 맞은편에 앉은 그가 조용히 이야기를 꺼냈다.
"솔직히 그쪽 첫인상이 별로였어요. 뭔가 화난 사람처럼 안 좋은 표정을 짓고 있고 인사도 대충 하길래 마음이 안 가더라고요. 나는 원래 아무한테나 말을 놓는 편도 아닌데, 형님이라고 해도 되냐는 말에 더 거리감이 생겼어요. 그런데 오늘 청소하는 거 보고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주방을 꼼꼼하게 닦는 사람은 처음 봤거든요. 그동안 모질게 굴었던 게 걸려서 된장찌개 끓인 거예요. 괜히 심술 부려서 미안했어요. 이제부터라도 편하게 지내요."
나는 어릴 적부터 가끔 싸가지 없어 보인다는 말을 듣곤 했다. 엽기토끼 같은 눈매에 무표정으로 일관하면 괜히 기분이 안 좋아 보였는지, 안 좋은 일 있냐고 물어보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다. 그래서 그 형의 입장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갔다. 아마 처음 이사 와서 낯선 사람들 앞에서 잔뜩 긴장한 채 경직된 표정을 짓고 있었을 테고, 그게 불만 가득한 얼굴로 비친 모양이었다.
사실 뭘 해야 할지 몰라 그냥 눈 가는 대로 손 닿는 곳부터 닦았을 뿐인데, 그게 이런 일로 이어질 줄은 몰랐다. 청소를 대충 했더라면 인상이 더 나빠졌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하필이면 같은 방을 쓰는 사람과의 관계가 껄끄러워 늘 신경이 쓰였는데, 그 형과의 오해가 풀리고 나니 마음이 거짓말처럼 가벼워졌다. 그날 이후 우리는 자주 밥을 같이 먹었고 여자친구 이야기도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듯한 사람을 자세한 사정을 모른 채 섣불리 미워하지 않은 건 운이 좋은 일이었다. 만약 그 형과의 대립 구도가 오래 지속됐다면, 호주에서의 추억은 지금처럼 아름답게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마 그즈음부터였을 것이다. 괜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처음 보는 낯선 사람들에게 눈웃음을 애써 짓기 시작한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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