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 농장 너머로

by 달보


주식 그래프가 고점을 찍고 며칠 만에 곤두박질치듯이,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내 인생도 그리 비슷하게 흘러갔다.


호주 브리즈번에 정착한 후로 모든 게 순조로웠다. 쉐어하우스 룸메이트, 어학원 친구들, 경쟁률이 상당한 주방보조 알바를 뽑는 곳에서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운 좋게 들어간 것까지. 비록 현지인 밑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시급이 낮았지만, 그럼에도 생활에 지장은커녕 오히려 저축해도 될 만큼 벌이가 괜찮았다. 호주는 월급보다는 주급 개념이 흔했다. 알바비도 2주마다 나왔고, 쉐어하우스 집세도 2주에 한 번씩 냈다. 한국에선 알바해서 버는 돈만으로 생활하는 건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호주에서는 알바만 해도 그럭저럭 먹고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루 8시간씩 평일만 일해도 한국 돈으로 400만 원 가까이는 벌 수 있었다.


한국에 있는 여자 친구와의 관계도 더없이 안녕했다. 평소엔 잘 보내지도 않던 셀카도 자주 보내오며 실시간으로 근황을 알렸다. 집 밖으로 나가면 높은 건물이 없어 구름이 그림처럼 박힌 광활한 하늘이 눈에 잘 들어왔다. 전 세계 사람들이 모인 듯한 시티를 걸으며 사람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매일 발걸음하고 싶을 만큼 멋드러진 브리즈번 스퀘어 도서관과, 사우스뱅크 파크랜드를 끼고 있는 브리즈번 강 주변을 걷기만 해도 다른 곳에서의 산책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렇게나 이상적인 환경 속에서 지내고 있음에도 문득문득 설명할 수 없는 공허함이 스며들었다. 나는 조금 더 색다른 자극을 원했다. 시티의 화려한 일상에 익숙해질수록 어딘가 밋밋한 기분이 들었고, ‘이렇게만 지내다 가는 건 좀 아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맴돌았다. 어쩌면 일상을 흔들 무언가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나의 바람이 하늘에 닿았는지, 세상은 나를 전혀 엉뚱한 상황으로 몰고 가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주 어릴 적 고향에서 알고 지낸 형님과 우연찮게 연락이 닿았다. 얼굴을 안 본 지 수년이 넘어갔고 살면서 다시 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한 사람이었다. 그런 이가 시드니도 멜버른도 아닌 하필이면 내가 있는 브리즈번에 있다니, 반가움에 몸서리쳤다. 만나면 딱히 할 말도 없으면서.


며칠 후 우린 시티의 어느 한식당에서 만났다. 옆에는 키가 비슷한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다. 함께 생활하고 있는 동생이라길래 어색한 인사를 주고받았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헝클어진 머리, 공장에서 찌들게 일하고 갓 퇴근한 행색이었다. 특히 다짜고짜 달려들 듯한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내 눈엔 분명 한국인이었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은 헷갈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 사람 때문인지 괜히 고향 형님까지 꾀죄죄해 보였다.


얼굴을 마주하기 전까지는 내가 그 형님을 도심으로 초대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막상 식당 안에서는 입장이 뒤바뀐 듯했다. 뭘 시켜야 할지 몰라 쩔쩔 매고 있는 내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다 시키라며 큰소리를 떵떵쳤다. 그런 형님의 모습이 낯설었다. 농장에서 일한다고 들었는데 돈 좀 꽤나 버는 모양이었다. 마치 시골에 사는 부잣집 도련님이 도심 한복판에 처음 나온 것처럼 메뉴판의 모든 음식을 다 시킬 기세로 덤벼들었다. 오랜만에 식당에서 한국 음식을 배불리 먹는 건 좋았지만, 마냥 얻어먹는 게 뭔가 찜찜했다.


불편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농장 일에 대해 본격적으로 물어봤다. 한적한 시골에 있는 딸기 농장에서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일하고, 업무 강도는 세지만 본인이 잘만 하면 꽤 큰 돈을 벌 수 있다고 말했다. 호주에 온 목적이 목돈을 마련하기 위한 건 아니었다. 막연하게나마 다양한 경험을 하고 돌아가겠다는 게 원래 목표였다. 하지만 그 말에 묘하게 끌리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시티에서 할 만한 것들은 어느 정도 해본 것 같았다. 어학원에서 공부하는 3개월 동안 두 단계나 월반할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고, 쉐어하우스 룸메이트들과 갖은 추억을 만들었으며, 태어나서 처음으로 직접 번 돈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에서 이룬 성과라 생각하니 괜히 뿌듯한 마음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호주에서 목돈을 모으려는 한국인 대부분은 농장이나 공장에서 일했다. 상대적으로 진입장벽이 낮은 건 농장이었지만, 공장은 웬만한 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들어가기 어려웠다. 공장은 농장보다 업무 강도는 다소 낮은 편인데다가 근무 조건도 안정적이고 보수마저 더 셌다. 그래서인지 경쟁률이 상당했다. 영어 실력도 어느 정도 요구돼서 내 입장에선 공장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느꼈다. 그렇다고 농장에 가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불쑥 나타난 고향 형님이 헤어지면서 남긴 '생각있으면 연락하라'는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시티 생활이 지루해졌던 건지, 아니면 그저 낯선 환경에 뛰어들어 보고 싶은 충동이었던 건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일상이 송두리째 바뀌는 큰 결정을 앞두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나는 그런 상황을 맞닥뜨리면 고민을 길게 하지 않았다. 알바 매니저님과 쉐어하우스 마스터에게 농장으로 가겠다는 말을 건넸을 때, 그들은 하나같이 충격 먹은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행보에 말문이 막힌 모양이었다. 내 얼굴에 확신이 차 보였는지 크게 말리진 않았지만 걱정스런 기색이 가득했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언제든지 연락해." 알바 매니저님과 쉐어하우스 마스터형이 나를 떠나보내며 거의 비슷하게 말했다. '아마 그럴 리는 없을 거예요'라는 말을 되뇌면서도 마음만큼은 참 고맙다고 생각했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새 숙소에 들어섰는데 오묘한 불쾌감이 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삐까뻔쩍한 빌딩들이 보이는 도심에 있다가, 사방을 둘러봐도 오로지 주택밖에 보이지 않는 외딴 곳에 와서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숙소 내부가 상당히 넓다는 생각은, 10명 남짓한 한국인들이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듣는 즉시 소멸됐다. 인사하면서 보니 그동안 만난 한국인들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하나같이 덩치가 커 보이고 어딘지 모르게 칙칙해 보였다. 마스터는 한국인 커플이었다.


하루 쉬고 다음 날 바로 농장으로 출근했다. 간편한 절차를 거치는 것만으로도 일할 수 있는 인부가 되었다. 대기실인지 휴게실인지 분간할 수 없는 사무실에는 랭킹이 적힌 리스트 종이가 한쪽 벽면에 자랑스럽게 붙어 있었다. 상위 10명 중 절반 이상이 한국인이었다. 조만간 나도 랭킹 안에 들 수 있지 않을까, 어딜 가나 나만큼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드물었으니까, 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내가 얼마나 세상 물정 모르는 애송이었는지는 농장 일을 시작한 첫날에 바로 알 수 있었다. 쪼그려 앉아 발로 움직이면 앞으로 조금씩 나가는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 양손으로 딸기를 따야 했다. 땡볕 밑에서 일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제야 고향 형님을 만난 날 두 사람이 왜 그렇게 새까맣게 탔는지 납득이 갔다. 딸기를 많이 딴다고 해서 그만큼의 보수를 받는 건 아니었다. 박스를 어느 정도 채우면 호주 현지인 관리자 트랙터 근처로 가서 일일이 검사를 받는데, 손가락 힘을 잘못 놀려서 손상된 딸기가 있으면 제값을 못 받았다. '보수는 하는 만큼 받는다'는 말의 의미가 제대로 와닿는 순간이었다.


쉬는 시간에 '하다 보면 요령이 생기겠지'라며 스스로를 달래고 있었다. 10분 후 일할 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갑자기 일부 사람들이 어디론가 뛰기 시작했다. 영문을 몰라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알고 보니 딸기를 조금이라도 더 따기 위해서 뛰어가는 한국 사람들이었다.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열심히 하는 거라면 자부심이 있던 나조차도 그 광경을 목격했을 땐 온몸에 힘이 빠졌다. 난 그렇게까지는, 할 자신이 없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고된 일이라는 걸 깨달은 것만 해도 정신적 데미지가 상당한데, 편히 쉬어야 할 숙소에서는 더 큰 난관에 봉착했다. "우린 무리 안 해. 카지노 한 번 갈 때마다 100불씩만 가져가서 태우고 오거든."라며 자랑스럽게 웃으며 말하는 고향 형님에게 배신감이 들었다. 숙소 사람들은 정확히 둘 중 하나였다. 카지노에 가서 달러를 태우고 오거나, 거실이나 마당에서 마리화나 같은 걸 피우거나. 정체모를 연기를 내뿜는 사람들은 눈이 풀려 있어서 근처에도 가기 싫었다.


나를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도박과 마약에 빠져 있는 걸 보니,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시티에서 함께 지내던 룸메이트들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같이 된장찌개를 끓여먹고, 공원을 거닐고, 알바하며 몰래 꽁쳐둔 음식들을 안주 삼아 와인을 곁들이며 청춘을 공유하던 그들이.


해 뜰 때가 아니라 해가 뜨기 직전에 어둑한 꼭두새벽부터 일해서, 해 질 때가 아니라 황금빛 노을이 가실 무렵까지 일하는 것만도 고되고 서러운데, 숙소로 돌아가면 사람들과 고생했다며 술잔을 부딪히기는커녕 혼자 쓸쓸하게 방구석에 엎드려 있기만 하니, 팔자에도 없던 우울증이 도질 것 같았다. 차가 없어서 어디 갈 수 있는데도 없었다. 일말의 희망을 안고 지도를 훑어봤지만, 얻은 거라곤 갈 만한 곳이 정말 한군데도 없다는 데서 오는 절망뿐이었다. 호주에 온 뒤로 가장 많은 사람들과 한집에서 지내게 됐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외로웠다. 정말 지독하게도.


며칠 후, 괴한에게 습격당해도 아무도 모를 법한 동네 어귀를 천천히 걸으며 스스로에게 조용히 질문을 던졌다. '나는 왜 여기에 와 있는 걸까?'


수십 억이 있어도 카지노에서 스트레스 푸는 DNA는 내 안에 없었다. 대마초나 마리화나는 평생 담배 한 번 물어본 적 없던 내겐 이세계로부터 불시착한 잡동사니와도 같았다. 돈 몇 푼 더 벌어보겠다고, 호루라기 소리에 파블로프의 개처럼 달려가서 딸기를 한 박스라도 더 따기 위해 발버둥치고 싶진 않았다. 결국 고향 형님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형, 나 여기 더 있다간 우울증 걸릴 것 같아."

딱 일주일만이었다.




농장에 오기 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염치없는 걸 알면서도 애써 무시한 채 전 알바 매니저와 쉐어하우스 마스터형에게 차례로 연락을 돌렸다. 우선 알바 매니저님은 아직 사람을 못 구했으니 다행이라며 얼른 돌아오라고 환영해주었다. 습기로 가득 찬 마음에 한 줄기 햇살이 비추는 안온함이 스며드는 듯했다. 다만 쉐어하우스가 문제였다. 내가 누워 자던 침대엔 이미 새로운 사람이 들어선 후였다.


"형님, 제가 사람들한테 일일이 연락해서 부탁해볼 테니까 거실 한켠에서라도 지내면 안 될까요?"


어떻게서든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다른 곳에 충분히 갈 수도 있었지만, 그곳이 아니면 다른 곳에서 지내는 생활은 그 당시로서는 도저히 상상되지가 않았다. 같은 방에서 지내던 두 명의 룸메이트, 그 옆 방에 있던 두 명의 여자애들, 커플룸을 혼자 쓰는 형님, 그리고 내 자리에 대신 들어온 얼굴 모르는 이에게까지 사정을 말하며 간곡히 부탁했다. 그렇게 극적으로 거실 한켠에 파티션을 세워 임시방편으로 칸막이를 만들었고 그 안에서 지내게 되었다. 결국 원래 살던 사람들과과 다시 함께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평소에 사람들과 스스럼 없이 잘 지내왔던 게 그때만큼 뿌듯한 적이 없었다.


고향 형님은 호기롭게 따라와놓고 오자마자 식겁하고 도망치는 내게 오히려 미안하다며, 그만큼 힘들어 할 줄은 몰랐다며 앞날에 건투를 빌어주었다.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섣불리 큰 결정을 내린 내 잘못이 명백했지만, 거듭 사과하는 형님의 모습에서 책임감과 죄책감을 느꼈다. 그 형님을 본 건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그후로는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고 있다. 애초에 연락을 주고받을 만한 관계가 아니기도 했으나, 왠지 그 형과 간단한 안부를 주고받는 것에서조차 그때의 우울감이 저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기어올라와 나를 덮칠까봐.


그렇게 나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다시 돌아와 보니 예전의 삶이 얼마나 나에게 잘 맞는 환경이었는지, 그 모든 순간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예고 없이 매정하게 떠나간 나를 잊지 않고 걱정해주며 다시 받아주기까지 한 사람들 덕분에, 일상의 소중함과 관계의 힘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한층 단단해진 마음으로 다시 일상을 살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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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보가 쓴 책 : 『신혼이지만 각방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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