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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덜 찬 쓰레기봉투를 버리는가

by 달보


부시럭 부시럭.


"쓰레기 버리게?"

"옙"


"아직 좀 남았던데 한꺼번에 버리지?"

"갔다올게유~"


나는 원래 게으른 사람인데 아내 앞에서는 그러지 않은 척 그나마 연기를 좀 하는 것 같다. 혹은 실제로 배우자가 보는 앞이라 그런지 조금은 더 부지런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딱히 내가 집안일을 더 해야겠다거나, 아내에게 점수를 따야겠다거나, 무슨 죄를 저질러서 눈치를 본다거나 그런 건 아닌데, 언제부턴가 집안일이 눈에 띄면 바로바로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딱히 그렇게 생각 안하는데, 아내 말로는 내가 거의 대부분의 일을 담당한단다. 요리 빼고. 사실 요리를 해주지 못하는 마음에 미안해서 그런 부분도 없잖아 있긴 하다. 그럼에도 그건 한때였고 지금은 거의 몸에 습관이 배어서 이런저런 일들을 처리한다.


식기세척기가 버젓이 옆에 있지만 싱크대에 그릇이 쌓여 있으면 웬만하면 바로바로 씻는다. 베란다에 들어가면 나도 모르게 내 눈이 세 가지를 스캔한다. 베란다에 들어갔다가 빨래통이 어느 정도 차 있고, 세탁 시간이 끝났을 때쯤에도 집에 있을 것 같으면 말없이 돌린다. 그리고 옆에 있는 종량제봉투와 분리수거 박스도 눈으로 훑어보고 둘 중 어느 하나라도 차 있으면 바로 나가서 버리고 온다. 물론 음식물 쓰레기통도 함께. 다 차지도 않았는데 왜 벌써 버리냐는 아내의 물음도 날이 갈수록 그 빈도수가 줄어들고 있다. 그러려니 하는 느낌.


나도 처음엔 쓰레기 봉투든 뭐든 간에 배가 불러 터질 때쯤에야 겨우 나가서 버리고 오곤 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가장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던 그 방식이, 가장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일단 내용물이 가득 차서 버리는 건 팔이 아프다. 가끔 무게가 별로 나가지도 않는데 손이 모자라서 한꺼번에 들고 나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한꺼번에 버리는 게 체감상 빈도수가 크게 줄어드는 것 같지도 않았다. 쓰레기는 일정 속도로 꾸준히 차는 게 아니라 들쭉날쭉한 인생처럼 예측할 수 없었다.


그중에서도 게으른 내 몸뚱아리를 움직이게 만드는 가장 커다란 요인은, 뭔가를 쌓아두는 것만큼 심적으로 불편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당장 처리하지 않아도 되지만 어차피 해야 하는 일들이 버젓이 쌓여 있으면 뭔가 기분이 찜찜하다. 당장 급한 일도 없는데, 하는 것도 없는데, 그냥 지금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방치할수록 처리량이 늘어나는 일을 가만 두는 게 왠지 내 삶을 방치하는 것만 같았다.


결혼 초기에는 퇴근이 조금 더 빠른 내가, 아내가 퇴근하고 오면 온전히 쉴 수만 있게끔 하는 목적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오로지 나의 안위를 위해서 귀찮은 일들을 기꺼이 도맡아 처리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아내의 점수를 따는 건 그저 덤일 뿐이다.


'나중에 해도 되겠지'

'급한 것도 아닌데'

'내일 할까?'


이런 생각들이 결국 뭔가를 '초과'하게 만들었다. 미어터지는 종량제봉투나, 이미 한계치를 넘어선 분리수거함이나, 자리가 없어서 일회용 비닐에 담긴 음식물쓰레기들은, 돌이켜보면 항상 바로바로 일어나지 않았다. 대개는 그전에 처리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고 놔둔 그 무엇 때문에 기어코 그런 일들이 벌어지곤 했었다. 그런 걸 몸소 느꼈음에도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몸 건강하고, 맑은 정신에, 급한 일도 없으면, 귀찮다는 이유로 할 일을 미루는 건 어느 각도에서 견주더라도 득보단 실이 많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결혼 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배우자와 한 지붕 아래 살아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지금의 나는 남들이 봤을 땐 불필요하게 부지런한 사람으로 보일 만큼 분주하게 움직인다. 직장에서도 싱크대에 그릇 하나만 보여도 바로 물로 씻어버리는 나를 동료들이 신기하게 쳐다볼 만큼.


지금의 나는 쓸데없이 부지런한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정작 내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가볍다. 이젠 굳이 이유를 붙이지 않는다. 할 수 있을 때 바로 해버리는 습관이 생각보다 많은 걸 덜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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